사회일반
[피플 & 스토리-김원웅 광복회장] “일본 경제보복은 어불성설…할 말하는 광복회 만들 것”
뉴스종합| 2019-08-02 11:18

지난달 18일 여의도 광복회관 앞. 광복회 회원 백여 명이 ‘독립’을 외쳤다.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기자회견이었다. 광복회는 이날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하겠단 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양손에 ‘경제보복 철회하라!’, ‘일본 제품 No’가 적힌 피켓을 든 광복회원들은 연신 최근 경제보복에 나선 일본 정부에 대해 사죄하라’를 외쳤다.

이날 회견의 중심에는 김원웅 광복회장이 있었다. 김 회장은 지난 5월 21대 광복회장에 당선됐다. 아직 당선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초보 광복회장’이지만 앞선 광복회장들보다 단연 눈길을 끌고 있다. 3선 국회의원 출신에 소위 ‘친 정권’ 핵심 인사로 분류되고 있는 데다 그가 내놓는 소신발언들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는 15일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광복회관 집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그의 집무실에는 많은 훈장들과 함께 안중근 의사가 만주 여순 감옥에서 남겼다는 글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가 걸려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日 경제보복…‘국제공조’가 해법=한일관계가 극악의 단계로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 이뤄진 김 회장과의 인터뷰 시작은 그래서 일본 아베 정부가 단행한 무역보복 조치 논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김회장은 ‘올 것이 왔다’고 분석했다. 오랜 기간 핵심 소재를 일본에 의존한 채 성장해온 한국 경제의 취약성이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현실화됐다는 분석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은 ‘국제사회 속 공조’가 해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한국 경제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일본 일변도’에서 ‘수입 다변화’에 나설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단결해서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봐야죠.”

이번 문제의 원인으로 김 회장은 일본 정부의 잘못된 국제 정세 인식을 거론했다. 최근 한국 대법원에서 내려진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 판결과 ‘일제 위안부 문제’ 등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고 배상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일본정부는 ‘국가간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의 이같은 의견에는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보상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김 회장은 “일본 정부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나왔던, ‘이후 한일관계에서 식민착취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근거로 삼고 있어요. 하지만 국제법상 개인의 피해에 대한 문제는 국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한일간 조약 내용이 개인에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죠”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의 인식’이 문제를 종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돼야 한다고 봤다. 그는 “전 정권 시절, 위안부 할머니들에겐 묻지도 않고 일본에서 10억엔을 받아와 화해치유재단을 만들며 일본정부에 빌미를 제공했어요. 하지만 피해자들이 사과를 원하는데 여기서 대통령이나 국가는 문제를 마무리짓자고 나설 자격이 없는 겁니다. 단 한명이라도 피해자가 사과를 원하면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할 말은 하는’ 광복회=14대와 16대, 17대 국회에서 3선 의원을 지냈던 김 회장은 2008년 임기를 끝낸 후 11년만에 여의도에 복귀했다. 여의도에 복귀한 김 회장은 ‘한일갈등 문제’에서처럼 할말은 하는 광복회를 만든다는 게 목표다.

김 회장이 21대 광복회장 선거에서 내건 공약은 ‘친일찬양금지법’, ‘친일청산법’ 등이다. 광복회가 직접 나서서 한국 사회 내에서 완벽히 해결되지 못한 친일 청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시사한 셈이다.

김 회장이 광복회 회장 선거에서 내건 슬로건은 “광복회의 잠자는 어깨를 흔들어 깨우겠다”였다. 그는 “광복회가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야 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이 설 수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광복회는 친일 등 문제에 많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선대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친일 청산 등 잘못된 문제에는 목소리를 내야죠. 저는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친일 인사를 솎아 내겠다는 공약도 이번에 내놨어요. 역사 정기를 바로세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지난 5월 총투표인 80명이 참여한 광복회장 선거에서 우당 이회형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 95세의 김영관 애국지사를 누르고 당선됐다. 1차 투표에서는 김 전 의원이 35표, 이 전 국정원장이 29표, 이 애국지사가 16표를 획득했다. 그리고 1,2위 후보가 붙은 2차 결선투표에서는 김 전 의원이 50표를 획득, 30표를 얻은 이 전 원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후 김 회장은 이후 과거사 이슈에 대해서 거듭 내놓은 발언들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광복회가 일본상품 불매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김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하로동선(夏爐冬扇)’의 정치인=김 회장은 지난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당시 집권당이던 공화당 사무처 직원으로 근무해온 김 회장은 1990년 민주자유당 3당합당에 반대해 꼬마민주당을 세웠다. 김 회장은 당시 ‘지역주의 청산’을 외치며 다른 젊은 정치인들과 함께 싸웠다. 14대 총선에서는 꼬마 민주당 출신으로 대전에서 당선됐다.

김 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부산에 노 전 대통령이 있었다면, 대전에는 김 회장이 있었다. 꼬마민주당 소속으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에는 강남에 꼬마민주당 다른 의원들과 함께 ‘하로동선(夏爐冬扇·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이라는 식당을 열었는데 당시 사장이 김 회장, 감사가 노 전 대통령이었다.

김 회장은 정치인 시절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힘쓴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 일제의 잔재였던 ‘국민학교’란 표현을 없애는 데 앞장섰고, 2002년 미군 여중생 압사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당시 보수야당(한나라당) 소속임에도 ‘진상조사’에 앞선 인물로 기록돼 있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김 회장은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장직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김 회장은 만 6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 회장은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과 제정구 전 국회의원,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끈끈한 사이였습니다. 제 의원은 1999년 페암으로 세상을 떠났죠. 그런데 노 전 대통령마저 떠나가니까, 저도 ‘그만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회장은 정치를 그만둔 후 강원도 인제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회협동조합을 운영했다. 그가 운영한 사회협동조합은 ‘허준약초학교’다. 그는 “국회의원시절 해외 사례들을 찾아보니까, 외국은 사회협동조합에서 상당히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최근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를 위해 지방에 사회 협동조합을 만든거죠”라고 말했다.

여의도에 광복회장이 돼 돌아온 김 회장의 의지는 예전처럼 뚜렷하다. 정치인 시절 그의 모토처럼 ‘할 말은 하는’ 광복회를 만드는 게 목표다.

“광복회는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의 단체입니다. 근대사 관련 문제들에 대해서 광복회가 직접 나서야 문제 해결이 더 수월해질 수 있어요. 이에 할 말은 하고, 보다 다양한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시민단체들과의 연대도 늘리겠습니다.”

김성우 기자/zzz@herla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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