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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광장-신동권 한국공정거래조정원 원장] 샤일록의 후회
뉴스종합| 2019-12-05 11:21

얼마 전 우연히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관한 소개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반사회적인 계약을 응징하는 재판관의 절묘한 판결로 익히 알려진 문학작품이다.

재판관 포셔는 살을 자르되 피를 흘리지 말고, 정확히 1파운드를 넘는 경우 죽을 것이고 재산은 다 몰수된다고 판결한다. 명판결의 예로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판결 전 재판관은 채무액의 세 배를 받도록 조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주인공 샤일록은 거부한다. 할 수 없이 재판관 포셔는 위와 같은 판결을 내리게 되고, 다급해진 샤일록은 원금만이라도 받아 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재판관 포셔의 제안도 일종의 조정으로 볼 수 있다. 조정에 응하지 아니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갔을 경우 있을 수 있는 위험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끝까지 소송으로 갔을 경우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울어야만 하는 상황도 나올 수 있다.

실제로 공정거래조정원에서 처리하는 조정 사건만 보더라도 소송까지 갔을 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쟁해결수단으로서 조정제도는 금전적 득실 말고도 시간적, 정신적으로도 한몫을 하는 제도라고 생각된다.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소송을 통하여 몸과 마음은 피폐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정제도의 취약점으로 강제성이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제3자가 조정안을 제시해도 분쟁당사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싱가포르협약이 체결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국제적 상사분쟁에 대한 조정 합의를 체약국에서 집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협약으로 한국, 미국, 중국 등 46개국 서명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비준절차를 거쳐 시행된다면 국제적 조정사건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효과가 되어 조정제도의 실효성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대체적 분쟁해결(ADR)수단으로서의 조정의 가치는 점차 증대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정제도가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조정원에서 하고 있는 공정거래, 하도급, 가맹 등 분쟁조정제도도 다른 일반적인 조정제도와 마찬가지로 역시 강제성이 없다. 당사자가 거부하면 조정이 무산된다. 그럼 소송을 통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쟁조정제도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조치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정을 통해 합의를 하면 공정위에서 별도의 시정조치를 하지 않도록 제도가 설계되어 있다. 물론 조정사건이라고 해서 추후 법 위반으로 100%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법 위반의 소지가 있어야 조정이 가능하므로 조정이 되지 않는 경우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통한 제재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제도를 통해 신속히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당국의 입장에서나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매우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재판상 화해의 효력을 갖는 점도 분쟁의 1회적 해결을 위해 매우 중요한 장치이다.

탄력적이고 유연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점도 큰 장점이다. 조정에 임하는 당사자가 열린 마음으로 백지상태에서 상대방에게로 출발하다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타협점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조정과정은 법적, 경제적 논리와 도덕적 감정까지도 혼합된 독특한 장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을 관리하고 합의점을 도출해 나가는 조정관의 노고에도 존경을 표하고 싶다. 조정과정에서 ‘베니스의 상인’에서 재판관 포셔의 혜안을 한번 상기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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