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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이 앗아간 ‘역대급 재능’…두산 베어스 성영훈의 ‘인생 2막’
엔터테인먼트| 2019-12-19 10:32
역대급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프로 무대에서 내려온 성영훈. 청소년 시절의 무리한 투구와 힘들었던 재활과정에서 깨달은 노하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지도자로서 제 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헤럴드경제=한영훈 기자] 2008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세계를 재패했던 주축 멤버들은 11년이 지난 지금 각 팀에서 한국프로야구를 이끈다고 할 수 있는 주요선수들로 자리잡았다.

현재 FA 신분의 안치홍, 오지환 선수를 비롯해 두산베어스의 박건우, 허경민, 정수빈, 삼성라이온즈의 김상수, KT위즈의 김재윤, 키움히어로즈의 장영석, LG트윈스의 정주현 등이 바로 에드먼턴에서 열린 2008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의 우승 멤버들이다.

그리고 또 한명, 이 팀의 에이스로 대회 MVP를 수상한 전 두산베어스 소속의 성영훈. 2008년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그는 대한민국에 3승을 안겼다.

그 가운데 백미는 역시 결승전에서 만난 야구종주국 미국. 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모인 이 경기에서 미국은 성영훈에 가로막혀 상상하지 못한 완봉패를 당하고 만다.

덕수고 소속으로 고교야구를 지배하고 우완투수 역대급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던 그는 두산베어스에 1차지명으로 선택된다.

150km를 쉽게 넘기는 직구. 고등학생 수준을 한참 뛰어 넘은 슬라이더. 그의 투구는 이미 프로야구판을 들썩이게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많은 기대와 설레임 속에서 2009년 프로야구 마운드에 오른 그는 정확히 10년이 지난 현재, 팬들의 안타까움과 함께 정들었던 유니폼을 벗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인생 2막을 위해 다시 한번 도전하는 그를 논현동의 한 야구아카데미에서 만나 짧지만 속깊은 얘기들을 통해 그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보았다.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었던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 시절의 성영훈. [OSEN]

Q : 성영훈 선수 요즘 근황은?

A : 은퇴를 하고 12월부터 지금 이곳에서 아마추어 선수들과 사회인야구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Q : 예전보다 살이 많이 찐거 같은데.

A : 재활하는 동안은 25kg 정도 감량을 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었는데,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마음편히 먹고 쉬고 있다 보니 많이 찌네요.

Q : 부상 당한 과정과 부위에 대해 설명을 좀 해줄 수 있나?

A : 첫 부상은 2010년도 삼성과 플레이오프 때 투구 중 팔꿈치 내측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어요. 투구 중 뚝 소리와 함께 직감적으로 뭔가 잘 못 됐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일단 마운드 위에 있었고 상대하던 타자는 마무리를 지어야 했기에 이 후에 두 개의 공을 더 던졌습니다. 그런데 두번 째 투구에서도 다시 한 번 뚝 하는 소리가 났어요. 당시 볼카운트를 1스트라이크 3볼로 기억하는데, 더 이상 던질 수가 없어서 덕아웃에 싸인을 보내고 교체됐습니다.

Q : 그리고는 바로 병원으로 갔나?

A : 그날은 그냥 통상적인 처치를 받고 다음날 갔습니다. 다음날 병원에서 MRI를 찍었는데 팔꿈치내측인대파열 진단을 받고 , 수술을 결정하게 됐죠. 그게 첫 번째 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상은 2013년 1월 군복무 후 팀 복귀 훈련 중 어깨가 불편한 것을 처음 느꼈고 그 이후로 통증이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아파서 병원을 갔는데, 병원에서의 진단은 정확하게 나오지가 않았어요. 통증이 너무 심해 2년동안 재활을 했는데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일본으로 건너가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게 됐습니다.

일본에서 진료를 받아보니 어깨 웃자란뼈와 관절와순 손상이 발견되어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그 진단소견을 받고 2015년 6월에 일본에서 어깨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다시 재활과 시합을 반복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2018년 2월 대만전지훈련에서 시합투구중 첫 번 째 부상 때처럼 부상이 다시 찾아 온거죠. 시합 중에 투구를 하는데, 뚝하는 소리가 또 나는 거에요. 아, 이거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통증을 참고 결국 전지훈련을 마쳤어요. 그리고 돌아왔는데 통증이 심해져서 4월에 다시 두 번째 팔꿈치 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그 후 팀에서 방출을 당했구요.

Q : 본인이 생각하는 부상의 가장 큰 원인은?

A : 복합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와서 누구를 탓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정말1도 없어요. 그렇지만 아직 신체가 완벽하게 발달하지 않았던 청소년 시절에 너무 많은 투구가 어깨와 팔꿈치, 허리에 많은 부하를 줬던 거 같습니다. 만약,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혼이 나더라도 아프다는 핑계로 그 정도의 많은 투구는 하지 않을거에요.

Q : 재활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점?

A :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불확실한 미래가 가장 큽니다. 재활과정은 엄청 지루해요. 매일 똑 같은 반복운동을 재활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하는 데, 사실 다친 부위가 다시 안 아플 것 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심리적으로 큰 위축을 줍니다. 그런 심리적 압박감속에서 언제가 될 지 모르는 싸움을 한다는 게 가장 겁이 나고 힘든 점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그 운동을 매일같이 반복해야 한다는 게 겁도 나고 힘이 들어요. 일반적으로 몸을 만드는 운동은 힘들어도 재미가 있는데, 재활운동을 달라요. 정말 죽고 싶은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찾아옵니다.

또 어깨와 팔꿈치에 통증이 굉장히 심했는데, 통증 때문에 자다가 깨는 일이 반복됐어요. 저는 사실 굉장히 숙면을 취하는 편이었는데, 부상당하고 난 다음에 통증으로 잠에서 깨기를 반복하다 보니 그 고통이 참 뭐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통증으로 생긴 병?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요. 잠을 푹 잘 수 없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Q : 정들었던 야구유니폼을 벗었는데, 아쉬움은 없는지?

A :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다시 마운드에 서보고 싶은 마음에 재활운동에 열심히 매진을 했습니다. 식단과 운동으로 체중도 약 25kg 정도 감량했구요.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재활운동을 하는 도중 또다시 어깨에 통증이 왔어요. 며칠을 참고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 조차 말하지 않고 있었어요. 근데 며칠이 지났는데 통증이 너무 심하게 느껴지는 거에요. 아~ 이 이상은 안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느낌이 왔어요. 이젠 내가 어깨를 쓸 수가 없구나 라고. 그 때 드는 생각이 더 이상 이 통증을 참고 운동을 이어나간다면, 내 몸에게 너무 큰 아픔과 고통, 몹쓸 짓을 하는 건데 라는 죄책감이 들더라구요.

이 죄책감이 나의 아쉬움을 덮어줄 만큼 느껴졌고, 이제는 운동선수로서의 마음을 지워야겠구나 하며 결정을 내렸습니다.

Q : 가족이나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A : 친구들은 아까우니까 더 해보라고 많이들 얘기했어요.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봐온 친구들은 아마추어 시절 제 공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자라왔던 터라, 저보다 더 제 공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거 같아요. 예전처럼 150km를 꽂을 수는 없어도, 투구스타일을 바꾸며 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얘기들을 해주더라구요. 많은 파이팅을 불어넣어줬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통증이 다시 느껴질 때, 나만 아는 내 몸 상태가 있는데 더 이상 볼을 던질 수 없다는 확신이 들면서 볼을 놓자고 다짐을 한 거죠. 결국은 은퇴를 결정하고 그렇게 주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제 의사를 존중해주셨습니다. 옆에서 10년 재활하는 모습을 보셨는데, 얼마나 속이 상하고 답답하셨겠어요.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 드렸을 때, 그 동안 수고했다고… (이 부분에서 성영훈 선수는 잠시나마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했다.)

고생 많았다며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Q : 야구선수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A : 200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좋은 친구들과 좋은 게임을 했었고, 개인적으로는 프로에 1차지명을 받고 난 후라 마음은 굉장히 가벼운 상태였거든요. 부담감도 없었고요.

또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완봉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완봉승을 하면서 MVP도 받고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나요. 10년이 훌쩍 지나고 생각해보니 우승의 의미 이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겹쳐지며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거 같네요.

Q : 앞으로의 계획은?

A : 12월부터 야구아카데미에서 헤드코치로 일을 하고 있어요. 아마추어 뿐만 아니라, 사회인야구를 하시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아마추어 엘리트 선수들이나 LG의 한선태 선수처럼 비선출 야구인들이 많은 꿈을 갖고 프로야구에 도전하는 터라, 바깥에서 그 분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내가 아파도 봤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선수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보고 싶습니다.

통증 없이 공을 던지는 것이 소원이었던 두산 베어스 시절의 성영훈. [OSEN]

인터뷰 진행 날, 기자가 야구아카데미를 찾았을 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열심히 훈련 중이었다. 학생과 함께 웃고 소통하며 지도를 하고 있는 성영훈 코치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시행착오를 겪어 프로 행이 좌절되고 다시 준비해서 프로의 문을 두드리겠다는 그 학생은 이곳에서 오고 나서 많은 자신감과 발전을 얻었다고 했다.

한국야구의 획을 그을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프로에 지명된 당시 성영훈 선수. 잠시 멈췄던 그의 시계는 다시 돌기 시작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혼자 걷던 그는 이제 터널 밖으로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 기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야구팬으로써. 그의 앞날에 건승을 기도해본다.

glfh200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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