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20대 청년들 눈에 비친 ‘2019년 대한민국’] “공정도 정의도 실종”…청춘들은 분노했다
뉴스종합| 2019-12-30 11:40
눌리고 받히고 나뉘고 분노하고…. 2019년 대한민국 20대 청년들은 모두의 ‘약자’(弱者)였다. 문재인 정부가 굳게 약속한 ‘공정’과 ‘정의’의 가치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쳤고, 극심한 취업난과 치솟은 부동산가격은 절망만 안겼다. 2019년을 보내는 대한민국 평균 20대들의 목소리엔 실망과 소외, 한숨과 좌절로 가득했다. [헤럴드경제DB]

국가가 약속한 ‘공정’과 ‘정의’의 가치는 적어도 2019년 20대 청년들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치솟은 부동산 가격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20대에겐 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됐다. 미중 무역전쟁과 각종 규제 등 대내외적 악재 속에 성장이 멈춘 경제는 당분간 청년들이 취업난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임을 알렸다.

올 하반기 한국을 집어 삼킨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는 20대 청년들에게 깊은 내상과 열패감을 안겼다. 평등과 공정, 그리고 정의를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올해 임기 절반을 넘었음에도 여전히 20대는 약자였다. 취업 못한 20대는 사회 최약체, 취업에 성공한 20대는 사내 최약체다. 올해를 20대로 보낸 이들 10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국과 ‘프로듀스101’ 사태…키워드는 ‘공정’= 올해 하반기 대한민국을 강타한 조국 사태는 20대에게도 역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 못지 않게 많은 20대는 엠넷 ‘프로듀스101’의 부정 투표 사건을 올해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꼽았다. 두 사건의 공통분모엔 ‘공정함’이 놓였다.

경기도에 사는 대학생 임모씨(25)는 “조국은 ‘586의 평균’을 보여준 사람으로 기억된다. ‘나는 안했다’, ‘당시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조국은 말한다”며 “자신들이 비난했던 박근혜·이명박 정부와 별 다를 것이 없는데도 아직도 그들 스스로는 ‘정의롭다’는 생각에 매몰돼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프로듀스 시즌이 모두 조작이었다는 뉴스를 봤다. 친구들끼리 ‘아예 취직을 할 때 금수저들은 미리 뽑은 다음에 남은 자리로 우리같은 사람들을 뽑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는 얘기를 했다”며 “특수계층들에게는 참 편한 세상이다. 불공정의 보편성은 여전하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학생인 박민정씨(24)는 “나는 고3 내내 수능만을 바라보며 잠도 안자고 공부했다. 그런데 조국 딸은 부모 잘 둔 덕으로 대학에 들어갔다”며 “더 화가 나는 것은 주변 어른들이 ‘그럴 수도 있다. 그 정도 부정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때였다”고 말했다.

대학생 전누리 씨(27)는 “조국의 딸은 아빠가 조국이라는 특권계층이기에 평범한 20대들은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얻었다. 박탈감을 느꼈다”며 “조국 사태를 보며 이번 생애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힘들겠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했다.

▶20대가 꼽은 충격적 사건은 설리·심석희 사건= 20대들이 꼽은 올해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는 가수 설리의 극단적 선택이었다. 취재에 협조해준 20대 10명 중 7명이 지난 10월 발생한 설리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했다. 시간적 근접성을 고려하더라도 설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20대에겐 큰 충격을 던졌다.

방송계에 종사하는 박모씨(27)는 “설리 사건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어디까지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며 “보이지 않는 공간에 숨어 타인을 끝없이 평가하고 욕하는 악플 세태는 아무리 여러명이 죽어도 변하지 않겠구나 생각마저 들었다. 회의감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직장인 유모(28)씨는 “구하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 일주일 정도 우울했다. 분하다고 해야 하나. 설리도 죽었는데 구하라까지지 죽어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에 취업에 성공한 이모씨(25)는 “성폭행 피해사실을 폭로한 심석희 선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쇼트트랙 선수다. 그 마저 그런 위험에 노출돼 있었단 사실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그가 겪은 사건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매우 일상적인 사건임이 밝혀져 더 충격적이었다. 빙상연맹은 뜯어 고칠 곳이 많다”고 말했다.

▶치솟은 집값…“대출없이는 월세도 막막”= 올 한해 뉴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 중 하나는 치솟은 부동산 가격이었다. 대개의 대화 패턴은 강남에 얼마짜리 아파트가 몇개월만에 얼마나 올랐다거나, 그 때 샀어야 했다는 아쉬움, 또는 집 가격이 많이 오른 이들에 대한 부러움 등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내집을 갖기엔 경제적 여건도, 빚을 낼 상황도 못되는 20대들에게 집값 폭등은 불공정 사회의 상징이었다. 권모씨(28)는 “집을 산다는 생각은 해본적도 없다. 체념 상태다. 걱정인 것은 집값이 오르면 월세나 전세도 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며 “20대 입장에선 몇 십년을 일해도 대출없이는 전세는 커녕 월세도 막막한 현실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 하는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홍모씨도 “이제는 집을 정상적으로는 살 수 없다. 평생 전월세를 전전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자포자기 심정”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박모씨(28)는 “이사를 해야해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집주인이 ‘어디요?’라고 되물었다”며 “집 주인은 집이 한두채가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되물어 온 것이었다. 부러움 보단 씁쓸함이 앞섰다”고 말했다.

▶“사람이 어떻게 자원인가요”…‘직장갑질 원인은 취업난’ 분석도=20대의 이른 나이에 이미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김모씨는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때 직장 간부가 ‘회사는 너희를 인적자원(휴먼 리소스)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며 “말 속에 뼈가 있었다. 너희는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회사에 정이 떨어졌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대체가능한 자원’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유모씨(28)는 “사회 여기저기서 꿈 좀 그만 물어봤으면 좋겠다. 내 꿈은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면 꿈 같지도 않은 꿈이라고 한소리 할까봐 답도 못한다”며 “나는 거창한 목표가 없어도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질문 자체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회사 ‘갑질’이 가능한 우리사회의 근본 원인이 취업난 때문이란 분석도 있었다. 정모씨는 “취업난과 같은 20대들의 위기는 기업입장에선 갑질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며 “회사 갑질은 취업 전 뿐 아니라 취업 후에는 더 하다. 취업해봐야 여전히 20대는 사회적 약자”라고 말했다.

홍석희·박상현·김민지 기자/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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