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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인삼 귀한 가치’ 알고도 주변부로 밀어냈다
라이프| 2020-02-21 11:01

독립한 미국의 첫 슈츌품 인삼을 실은 '중국황후'호와 항로.“영국 동인도회사는 미국이 직접 인삼 수출에 나서게 되자 큰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무역의 세계에서 노련하기 짝이 없는 영국 동인도회사는 북미삼의 물량 공세가 결국 중국 시장에서 인삼 가격의 하락을 초래하리라 예견하고 있었다.”(‘인삼의 세계사’에서)

#1736년 2월9일, 파리의과대학에서 뤼카 오귀스탱 폴리오 드 생바스의 박사학위논문심사가 열렸다. 논문의 제목은 ‘인삼, 병자들에게 강장제 역할을 하는가?’. 생바스는 인삼이 설사, 이질, 위와 창자의 통증, 실신, 마비 증세 등을 치료하는 데 유용하며, 쇠약해진 기력을 회복하는 데도 독보적인 효능을 지닌 약이라고 주장했다. 인삼이 강장제로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린 서양 최초의 박사학위논문이다.

280여년 전, 서양에서 인삼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가 애용하는 인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인삼에 대한 서양 최초의 기록은 이 보다 120여년 거술러 올라간다.

1617년 일본 히라도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원 리처드 콘스가 런던 본사에 통신문과 함께 고려인삼을 보낸 기록이 나온다. 콘스는 통신문에 “한국에서 온 좋은 뿌리를 보낸다. 여기서 이 뿌리는 은과 맞먹은 가치를 가지는데, 너무 귀해서 보통 사람의 손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한국과 교류할수 있는 쓰시마 번주에 의해 무조건 일본 천황에게 보내진다”며, 이 곳에서 이 뿌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약으로 간주되며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충분하다고 적었다. 고려인삼이 유럽에 상륙한 것을 증명하는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렇듯 서양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은 인삼은 어느 때 부터 주변부로 밀려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덮어쓰게 된다. ‘인삼의 세계사’(휴머니스트)는 서양사학자 설혜심 연세대 교수가 세계사적 시각에서 인삼의 역사를 복원한 책으로, 그동안 한중일 중심의 연구에서 벗어나 17세기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의 주요한 세계상품으로서 인삼을 재조명한 것이 새롭다.

저자는 이를 위해 의학 논고 부터 약전, 동인도회사 보고서, 경제학 논고, 식물학서, 지리지, 여행기, 사전, 소설, 광고에 이르기까지 서양문헌을 모두 찾아내 기록과 기록을 오가며 세심하게 그 궤적을 살폈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인삼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예수회다. 이들은 종교활동 뿐 아니라 무역과 기술·학문 교류에 남다른 기여를 했지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본초학이다. 당시 유럽은 신대륙 발견을 통해 약초의 신세계에 빠져 있던 상태로, 중국과의 접촉에서도 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 중 폴란드 출신 미하우 보임은 특히 ‘본초강목’에 빠져 22가지 약재를 정리해 유럽에서 ‘중국의 식물군’(1656)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유럽인들이 특히 관심을 가진 게 인삼이었다.

1713년 중국에서 활동한 프랑스 출신 예수회 신부 피에르 자르투의 인삼보고서는 서양의 인삼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강희제의 명으로 지도제작을 위해 만주지역을 답사하러 간 그는 한국과의 경계에서 인삼을 보게 되는데, 그는 보고서에 충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바로 인삼의 자생지에 관한 언급이다. 자르투는 인삼이 만주에서 발견되지만 중국 내지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단언하는데, 이는 중국 심장부에서 최고의 인삼이 산출된다는 기존의 주장, 일종의 ‘신화’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설 교수는 중국 내지에선 인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도 백제삼이 중국삼 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퍼지게 된 연유를 조목조목 따져 나가는데, 18세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베스트셀러가 된 장-밥티스트 뒤알드 신부의 '중국통사'가 그런 오류의 근원으로 지목된다. 중국 사료에 대한 이해없이 베껴 쓴 결과, 존재하지 않는 중국삼을 1등으로, 한국인삼을 2등으로 취급했다는 설명이다.

철학자 론 로크의 기록, 라이프니츠가 인삼의 효능에 대해 궁금해하며 질문한 편지들, 실제 인삼을 치료에 사용한 의사들의 임상사례도 눈길을 끈다.

인삼의 서양 역사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인삼이 미국의 첫 수출품이란 점이다. 이는 미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16년 북아메리카 인삼, 화기삼의 발견은 인삼의 세계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사건으로 기록된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신부 조제프 프랑수아 라피토가 몬트리올과 오타와 사이 북위 45.31지역에서 인삼과 비슷한 식물을 발견, 캐나다 모피상들이 이를 수출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미시간, 매사추세츠, 뉴욕과 위스콘신, 미네소타 등 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면서 미국삼은 특산물로 각광을 받게 된다. 미국은 무역 경험이 일천했지만 영국의 사례를 통해 확신이 있었고, 이런 과정에서 독립국가 미국의 첫 해외 수출품으로 선택되게 된다. 1784년 ‘중국황후’(Empress of China)호는 인삼을 싣고 중국으로의 첫 항해에 나섰다.

그러나 18세기 북아메리카 대륙의 인삼 채취 및 수출 열풍은 무분별한 채취로 이어지고, 가격하락을 가져왔다. 중국에서 북미삼은 싸구려 취급을 받았는데, 다량으로 들어간 탓도 있지만 효능도 떨어지고 상품포장도 조악했다는 평가다.

인삼의 매력에 푹 빠졌던 서양의 거리두기, 퇴출움직임은 18세기 중엽부터 조짐을 보인다. 당시 인삼은 유효성분을 추출하기가 매우 까다로워 서양의 근대 약학 시스템에 편입되는 게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서양은 문화적으로도 인삼을 멀리했다. 저자는 서양이 인삼의 생산과 수출에 깊이 관여했음에도 인삼을 ‘동양의 전유물’로 타자화하게 된 배경으로 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동아시의의 인삼 가공 기술에 대한 열등감과 문화적 구별짓기에서 찾는다. 서양이 인삼에 동양성, 사치,방탕, 비합리성과 불가해성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워 주류 문화에서 소외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미국의 주류 문화는 인삼을 철저히 중국의 아이템으로 규정했고 그 과정에서 인삼에 의지해 살아온 자국민 또한 소외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인삼의 세계사적 맥락을 드러내기는 처음으로, 인삼의 효능에만 초점을 맞춰온 시야를 확장시켜 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인삼의 세계사/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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