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대법관 한 명이 연간 3900건 사건 처리…임기 6년은 기록과의 전쟁
뉴스종합| 2020-03-18 11:39

‘아침에 출근하면 직원이 차를 내오기 전에 사건기록과 연구보고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점심은 12시25분경 구내식당에서 해결한다. 사건검토에 몰두하다 보면 점심때를 놓치기도 하기 때문에 12시25분에 알람을 맞춰놓는다. 오후에도 오전과 마찬가지로 검토가 이어진다. 저녁 6시30분에서 7시 사이에 퇴근을 한다. 퇴근 5분 전에는 가방을 차에 실어놓는다. 가방 안에서는 집에 가서 읽어볼 연구보고서가 있다. 저녁을 마치면 블랙커피를 마시는 것과 때를 맞춰 싸들고 온 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정을 넘어서기 일쑤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쉽게 잠들지는못한다. 하루 종일 검토한 여러 사건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사건들이 자꾸만 떠오르고 어떻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노동법 분야 권위자인 김지형(62·사법연수원 11기) 전 대법관이 퇴임 기념 눈문집에 남긴 일상 기록이다. 대법관의 업무는 기록과의 싸움의 연속이다. 공개 재판이 열리는 1,2심과 달리 대법원은 법률심이다. 사실관계를 확정짓는데 관여하지 않고, 법리 잘못이 있는지만을 검토한다. 예외적으로 공개변론을 여는 사건이 있을 뿐이다.

18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대법원에 접수된 상고심 본안사건은 4만7979건에 달한다. 대부분의 상고심 사건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소부에서 심리한다. 대법원에는 1~3부, 3개의 소부가 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 선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는 사건, 소부 대법관 사이에 합의가 안되는 사건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함께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한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대법관 1인당 1년에 3900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하는 셈이다.

대법관들은 소부 합의 혹은 전원합의체 토론 때 외에는 거의 기록에 파묻혀 지낸다. 외부활동도 많지 않다. 박시환 전 대법관이 휴일마다 출근해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며 기록을 봤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취임날 하루만 좋은 게 대법관’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상고심 사건 규모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한 전직 대법관은 “대학 병원 역할을 해야 할 대법원이 감기 환자를 보느라 연구를 못한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1,2심 재판을 충실히 하는 대신 3심 재판을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에만 받아주는 상고허가제 재도입이 논의되고 있지만,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아 추진에 난항을 겪고 있다. 좌영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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