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의 아주 이상한 무의식
뉴스종합| 2020-03-25 20:15

‘텔레그램 n번방’.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반인륜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지 보여줬다. 이들의 불건강한 무의식이 얼마만큼 저급한 수준인지도 드러났다.

무의식은 변형을 거듭하며 일상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심리적으로 보면 n번방 가해자들의 천인공노할 행태를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투사(projection)'의 파괴적 효과와 결과가 대인관계에서나 사회적으로 어떻게 병적인지 초점화해 들여다볼 수는 있다.

투사는 쉽게 말해, 나의 바깥에서 감정을 담을 만한 대상을 찾는 일이다. 그 대상은 사물이 될 수도, 타인이나 사회 또는 더 큰 범위의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사진=123RF

사람들은 자신 안에 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실제로 내면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인식하곤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지갑을 갖고 있는데 지갑은 혹자에겐 사치재로서의 대상일 수 있다. 또 다른 이에겐 무거워서 갖고 다니기 귀찮은 무거운 물건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겐 불쾌한 감정이 담겨 있는 지갑일 수도 있다. 지갑을 갖고 싶었던 어린 시절, 소유의 욕구를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수치심과 거절감을 불러일으킨 대상 말이다. 극단적인 경우 지갑을 계기로 지난 시절의 부정적 감정이 극대화된다면 그것을 선물해준 사람에게 던져버릴 수도 있다. 또 선물해준 사람이 무례하거나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곡해할 수도 있다.

즉, '지갑'이라는 대상은 특별히 ‘나쁘다/좋다’, ‘유용하다/쓸모없다’를 가리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지갑을 대하는 나 혹은 사회의 주관적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일 뿐이다. 피사체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투사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정황이나 결과에 따라 나쁜 투사가 있을 수는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서술한 지갑에 관해 좀 더 깊이있게 살펴보면 거기에는 감정이 담겨 있다. 지갑뿐 아니라 우리는 일상에서 동식물, 예술 작품, 가족이나 연인, 학교, 직장 등 나 아닌 다른 무엇에 감정을 투사하며 산다. 투사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의 결과다.

이를테면 봄기운에 긍정적 감정을 투사해 꽃과 자연이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 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투사이고, 보편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해칠 가능성은 아주 낮다. 내 안에 있었던 투사의 내용이 긍정적 감정에 가깝다면 그 감정을 대상에 투사했을 때 대체로 다른 이들도 이를 좋게 받아들이기가 쉽다.

반면 부정적 투사도 있다. 열 번 중 한 번꼴로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 B가 평상시 A에게 부탁을 해 호의와 도움을 얻어냈다. 어느 순간 A가 어느 한 가지 부탁은 자신의 상황상 들어주기가 어려우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A의 반응에 B가 'A는 정말 예의가 없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악평을 쏟아냈다. B의 반응 기저에는 거절감에 극도로 취약한 낮은 자존감, 수치심, 분노 등이 깔려있다.

분명 B는 확률적으로도 A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는 A의 전체적, 평균적인 호의를 단 한 번의 거절로 인해 악의로 전환시켰다. 강렬한 부정적 감정을 A에게 투사한 셈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런데 이 투사의 기제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과 연동돼 작동한다.

사실 무의식의 영향이 더 크다. '내가 지금 투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 수준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지만, 무의식은 깊고 매우 교묘하다.

의식보다 가려져 있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의식 수준에서 인지하기도 전에 즉각 도저히 받아들이기 싫은 지갑을 내던지거나 B처럼 A를 순식간에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즉 부정적으로 투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불건강한 무의식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부정적 투사의 대상이었던 상대방(A)이 '그 부분은 좀 지나친 것 같고 옳지 못한 처사다, 네가 나의 의도와 다르게 생각하니 섭섭하다' 등으로 말하더라도 B는 자신이 무슨 의도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투사한다.

평상시에 언제 '무의식적으로'라는 표현을 쓰는지를 살펴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라고 말할 때가 많다. 가령 불쑥 화를 낸다거나, 왠지 슬퍼지거나, 평소보다 더 사치를 부린다거나, 말없이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거나 등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다시 A와 B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살펴보자.

A는 '난 네게 호의를 가지고 대했는데 단 한 번만으로 나를 그렇게 평가한다니 슬프다'고 말한다.

B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실제로 네 이기적 마음에서 그렇게 얘기했잖아'라고 응수한다. 이후 B가 A에 관해 부정적 평가를 주위에 전한다면, 그는 (무의식이 채 의식화되지 않은 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A가 가슴이 답답하고 명예훼손까지 당했다는 생각에 불쾌함, 무력감마저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A가 B의 다소 차분하고 진정된 내면에게 조심스레 대화를 건다면 그는 "나도 나를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을까?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25일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이날 경찰은 국민의 알권리, 동종범죄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차원에서 조주빈의 신상을 공개했다. [이상섭기자/babtong@]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은 '이렇게 해도 마땅하다'는 그들만의 무의식적 확신과 조소로 피해자들을 투사물로 악용했다. 그러면서 심지어 돈과 쾌락을 누리고 조소도 함께 하겠다는 공동(?) 의식까지 획득했다. 미성년자인 피해자들이 어린 나이에 자신의 몸과 감정의 경계를 지키는 법을 채 배우기도 전이다. 이들이 복합외상과 기타 심각한 문제로 장기간 혹은 평생 동안 고통 받을 것이란 이성적 판단이 전혀 되지 않았다. 가해자들의 이러한 무의식은 각자 내면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낮은 자존감과 수치심, 실제적인 능력 결함을 반영한다. 어떻게든 이것들을 바깥으로 투사해 쾌락을 누리겠다는 심사로만 가득 찼던 것이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상황을 고려할 능력이 결여돼있다.

사회화를 거쳐 한 개인으로 발돋움하기 전 단계에 놓인 미성년자들, 물리적으로 남성보다 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들이 심리적 생존을 위해 부정적 투사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단 사실에 깊은 한숨을 내뱉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투사와 사회적 약자를 겨냥한 범죄가 하나의 현상으로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 분노한다. 더 나아가 정신건강의 실체에 대해 솜방망이도 못 되는 판결이 나오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에 부끄럽다.

피해자가 자기 몸/생각/감정의 경계를 지켜내지 못한 트라우마로 인해 일상을 생존 위협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기까지 필요한 시간과 비용, 노력은 한 개인으로서나 상담자로서 감당하기가 어렵다. 계량적 논리대로라도(피해자가 입은 피해가 계량화된다는 것도 억측이고 무례한 처사라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측량이 불가하다. 가해자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나온다면 이는 그들의 부정적 투사물로서의 무의식의 실체에 대해 '왠지,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넘어감을 의미한다.

국가와 사회, 개개인의 무의식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코로나19 대응에 세계의 극찬을 받은 것처럼 정신적으로도 건강함을 보여주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글=유세진, 유세진은 JTBC, 연합뉴스 등에서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연세대 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상담코칭학 석사를 수학한 상담사. 저서로는 〈리멤버〉(2019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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