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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대로 상속’ 길 열리나
뉴스종합| 2020-05-22 11:26

70대 자산가 A씨는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유행하자 자신에게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A씨는 미뤄놨던 상속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준비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 서둘러 금융회사를 찾았다.

금융회사에 부동산, 절세 정보를 주로 문의하던 고액자산가들이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상속과 신탁제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특히 본인의 의사대로 상속할 수 있는 유언대용신탁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게 금융업계의 전언이다.

▶유언대용신탁 문의 급증에 금융권 서비스 강화=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3월 유언대용신탁은 유류분 반환 대상이 아니라는 법원의 1심 판결이 나온데 이어 코로나19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유언대용신탁에 대한 자산가들의 문의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유류분은 고인(피상속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상속인들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유산 비율로, 그동안 유언대용신탁 시장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하지만 이번 1심 판결이 향후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유언대용신탁을 통해 자신의 뜻대로 재산을 상속, 처분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유언대용신탁 활용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오영표 신영증권 패밀리헤리티지본부장은 “코로나19를 피부로 경험하며 지금, 바로 상속을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특히 유류분 관련 1심 판결 이후 상속을 유언대용신탁으로 준비하려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정식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도 “유류분 1심 판결로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상속할 수 있게 된다는, 상속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발생하고 있다”며 “기업 승계, 2차 상속(배우자가 사망한 부모의 상속), 1인 고령가구 등을 중심으로 상속 관련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이에 금융권에서도 유언대용신탁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2010년에 처음 유언대용신탁을 도입한 하나은행은 리빙트러스트센터를 통해 컨설팅부터 집행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하나금융투자와 연계해 신탁 상품 라인업을 다양화하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신영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이 유언대용신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신영증권은 변호사, 세무사, 보험 전문가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은 종합 자산승계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으며, 최근 조직개편을 통해 신탁사업부를 본부급으로 격상하고 지점 PB인력을 충원했다.

▶신탁시장 성장 기폭제 될까…재신탁 허용·세제혜택 등 필요=유언대용신탁이 활성화될 경우 신탁시장 성장세에도 탄력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신탁 수탁고는 2월 말 1000조원을 돌파해 1002조8815억원을 기록했다. 신탁법을 개정한 2011년(409조원)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한 규모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유언대용신탁 관련 문의가 늘어나는 정도였다면 2심 판결 이후부터는 가입도 함께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는 여전히 국내 시장 규모나 수준이 신탁업 본원지인 영국, 미국은 물론이고 이웃나라 일본과 비교해서도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2006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며 신탁시장이 급성장했으며, 2011년 영화 ‘엔딩 노트’ 개봉으로 ‘슈카츠’(終活·스스로 임종을 준비하는 활동)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며 유언대용신탁 바람이 불었다. 일본신탁협회에 따르면 2012년 1만8051건이던 유언대용신탁 누계 계약건수는 지난해 9월 17만5446건으로 10배 가까이 폭증했다. 교육자금증여신탁, 양육비지원신탁 등 형태도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일본보다 고령화가 빠른 한국이야말로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에 앞서 발빠르게 신탁시장 활성화에 돌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우선 과제로는 ‘재신탁’ 허용이 꼽힌다. 재신탁은 재산을 신탁받은 수탁자가 각 분야별 전문가들에게 다시 맡기는 것을 말한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고객들의 주요 자산 중 부동산의 비중이 절대적인 데 반해 금융회사의 전문성은 떨어진다”며 “금융회사가 각 분야 전문가를 통합한 허브 역할을 할 수 있어야 종합재산신탁 서비스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제 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배정식 센터장은 “일본의 경우 교육자금증여신탁에 1500만엔까지 비과세 혜택을 줘서 손주 세대에게 돈을 흐르게 하고 소비도 부양하는 넛지 효과를 발생시켰다”며 “신탁 상품에 일정 수준 세금 공제 혜택을 제공해서 관심과 이용이 높아지면, 정부에서도 신탁에 가입한 노인층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강승연·김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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