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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갑질 낳은 ‘잡일’ 사라진다지만…‘절대을’ 경비원 “잘릴까 걱정”
뉴스종합| 2020-05-25 09:50
25일 오전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의 경비 초소. 아파트 경비원이 청소를 하기 위해 잠시 초소를 비운 상태다. 신주희 기자 / joohee@heraldcorp.com

[헤럴드경제=신주희 기자] 서울 강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박모(63)씨는 몇 년 전 아파트 주민에게 택배를 가져다 주다가 갑질을 경험했다. 박 씨가 초인종을 두 차례 누르자 해당 주민은 문을 열고 나오며 “좀 그만 누르라”며 벌컥 성을 냈다. 주민은 이후 아파트 관리소장을 찾아가 “경비원이 예의 없다. 경비원을 바꿔 달라”고 압박을 주기도 했다.

경비원들은 ‘본업’인 경비 업무 외에도 택배 정리, 청소, 주차 관리 등 잡일을 하다 주민의 갑질 대상이 되는 일이 잦다. 최근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고 최희석(59) 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계기도 주차 관리를 하던 중 주민과 시비가 붙으면서였다.

현행 경비업법상 아파트 경비는 은행·오피스 경비와 같이 ‘시설경비원’으로 분류돼 경비 업무 외에 재활용 쓰레기장 관리나 청소, 제초 작업, 조경 관리, 주차 대행 등은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아파트 경비원들이 경비 업무보다 ‘잡무’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지난해 전국아파트경비노동자고용안정권리선언공동사업단 보고서에 따르면 경비 업무 시간 중 방범·안전 점검 업무는 31%에 그쳤다. 오히려 분리 수거, 청소, 택배 관리 등 업무가 69%였다. 경비 업무보다 잡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경비원들이 잡일을 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마찰이 생겨 갑질 위험에 노출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원준 한국경비인협회중앙회 서울협회장은 “아파트 경비원은 은행 청원 경비와 같은 자격을 가지는 데도 사람들은 아파트 경비원이 잡일을 하니 을(乙)로 여기는 것”이라며 “위험 상황에 대비해 경비를 서는 것을 두고 아파트 경비원들이 놀고 있다고 생각해 또 잡일을 시킨다. 전반적으로 아파트 경비 업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경찰청은 오는 6월부터 아파트 경비원이 경비 업무 외 청소나 조경 등 다른 일을 할 때 ‘경비업법 위반’으로 단속하려 했으나 이를 연말까지 연기했다고 지난 3월 밝혔다. 경찰청은 국토교통부와 함께 함께 연말까지 아파트 경비원의 법 위반 소지를 없애기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현장에 있는 경비원들의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경비원들 사이에서는 “경비 업무만 하다가는 잘릴까 걱정이 크다”, “경비원은 당연히 경비 업무만 해야한다” 등 입장이 갈렸다.

25일 서울 강서구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 관리비 고지서를 우체통에 꽂아 넣고 있던 경비원 박모(65)씨는 “청소 또는 이렇게 관리비 고지서를 나눠주는 일을 안 하면 정말 좋겠지만 관리 인력을 또 써야하니 경비원들이 많이 필요 없어질 것”이라며 “경비 업무 외 잡일을 금지시키는 취지는 정말 좋지만 우리는 또 생계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반면 이날 같은 아파트 입구 경비원 초소에서 경비 업무를 보고 있던 김모(62)씨는 ‘경비 업무 외 잡일 금지’에 대해 “당연히 경비 업무만 해야죠”라며 단호히 말했다. 김씨는 “이런 말 하면 잘린다”면서도 “오늘도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나뭇가지도 치고 작년에는 아파트 담벼락 페인트도 칠했다. 경비원들은 경비 업무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만난 경비원 모두 아파트 경비원의 잡일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지만 ‘해고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같았다.

아파트 입주민들도 경비 업무외 잡일 금지에 대해서 취지는 공감하지만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의 동대표 신모(53) 씨는 “지난해 아파트 공동 현관에 자동문이 설치되면서 안 그래도 경비원을 대폭 줄여 주민들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아파트 경비원들이 경비 일만 해야 한다는 취지에 동감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경비원 해고가 불가피하지 않을까”라며 우려했다.

이에 대해 이원준 회장은 “공동주택관리법과 경비업법으로 이원화돼 있는 아파트 경비원 관련 법을 통일시키고 경비 자격을 공인화해 경비원들의 입지를 높이는 것이 경비원 갑질을 막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joo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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