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피플앤스토리] 윤진수 교수 “뿌리깊은 사법불신 문화, 인정하고 문제 접근해야”
뉴스종합| 2020-09-18 11:11
윤진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62년간 민법에 명시된 ‘친권자의 징계권’ 조항 삭제를 추진한 민법학계의 대가다. 윤 교수는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징계권 조항이 남아 있으면 사람들이 ‘체벌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그럼 없애는 게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고 개정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이상섭 기자

자녀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인데, 부모가 종교적 이유로 치료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014년 이전에는 마땅히 방법이 없었다. 민법에서는 부모의 친권을 상실시키는 극단적인 규정만 있었다. 일시적 상황 때문에 부모와 자식 관계를 단절시켜야 하느냐의 논란과 아울러 친권 상실까지 시간이 오래걸리는 문제점도 있었다. 이 문제는 민법이 친권을 일시 정지하거나 일부만 제한할 수 있도록 개정되면서 해결됐다.

민법학계 대가로 꼽히는 윤진수(65·사법연수원 9기)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부모 친권 제한 문제를 포함해 그동안 민법 개정 실무작업에 참여했다. 아동학대 문제가 공론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부모의 자녀 체벌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도 그가 위원장으로 활동한 법무부의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 작품이다.

윤 교수는 인터뷰 요청을 받고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도 인터뷰할 게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민법은 보통 사람들의 생계와 가장 밀접한 법이다. 물건을 사고 팔고, 집을 빌리고, 대출을 받으며 담보를 잡히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민법을 기초로 한다. 부모와 자식, 배우자 관계나 상속문제도 마찬가지다. 부장판사 출신으로는 드물게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학계에 몸담은 윤 교수는 그동안 179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고, 민법 개정 실무 작업에도 오랫동안 참여했다. 지난 3월 23년간의 현역 교수 생활을 마치고 서울 서초동에서 민사법연구소를 운영하며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 교수를 만났다.

2014년 부모 친권 제한 입법은 윤 교수에게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2000년 무렵에 아이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부모가 종교적 이유로 거부한 일이 있었거든요. 법이 공백상황이었던 거죠. 법무부 민법개정위원회에서 용역을 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어요. 친권상실은 엄중한 일이잖아요. 시간도 많이 걸려요. 여호와의 증인 신도라고 해서 나쁜 부모인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법원이 친권을 일시 정지시키고, 치료받는 데 동의하라고 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어요. 학자로서 보람있는 일이었죠.”

윤 교수는 법조인이 된 계기를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부친이 의사였고,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 법대 진학 후에는 사법시험을 봤다. “대학 4학년 때 ‘법과 사회’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사법시험 합격기를 분석해서 리포트를 내보라는 거에요. 합격기를 모두 모아서 읽었더니 2가지더라고요. 대학을 안갔더라도 정말 의지가 있어서 합격한 사람. 이런 분들 합격기는 읽을만 하죠. 그런데 대다수는 공부 잘하니까 ‘너 법대 가라’고 해서 온 사람들. 이쪽은 재미가 없어요. 저는 후자에요. 어머니는 의대를 가면 어떻겠냐고 하셨지만, 지금 생각해도 의대는 안 간 게 잘했다고 생각해요.”

윤 교수가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선발인원이 60여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판사나 검사 임용이 가능했다. 윤 교수는 판사로 임관했고, 14년 동안 법원에서 일했다. 그는 “막상 일선 재판 경험은 많지 않다”고 했다. 헌법재판소 연구관으로 2년동안 근무했고,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도 3년6개월을 일했다.

1994년 생수 시판이 가능해진 것은 그가 재판연구관으로 있을 때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였다. 윤 교수는 이 사건을 “가장 어려웠다”고 회상한다. “나중에 헌법재판소장이 되신 김용준 대법관이 이 사건 주심이었어요. 원래 저는 대법원에서 민·형사 검토를 주로 했는데, 이건 행정사건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이건 윤진수가 검토하라’고 하셨죠. 아마 먼저 보고서 결론이 마음에 안드셨던 것 같아요. 일을 맡아보니 문제가 있었어요. 항소심에서는 생수 시판한 사람들에 대한 제재가 정당하다고 했는데, 취소해야 한다고 보고서를 냈죠.” 결국 대법원 판결로 생수를 국내에서 판매 금지하는 고시는 직업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위헌 규제로 결론났다. 이 판결을 계기로 1995년 ‘먹는물 관리법’이 제정됐다.

윤 교수는 1996년 수원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원을 떠났다. 원래 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그 해 서울대 가족법 교수가 퇴임하면서 자리가 났다. 윤 교수는 서울가정법원 판사로도 일한 경력이 있었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연구관으로 일한 경험도 학자로 일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헌재에서 2년간 근무했던 건 좋은 경험이었어요. 시야가 넓어진다고 할까요. 그 전에는 법 해석만을 놓고 고심했는데, 법이 위헌일 수도 있구나 싶으니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민법 교수를 했지만, 항상 헌법과 관련시켜 생각을 하게 됐죠.”

윤 교수는 학교로 간 이후에도 실무자들과의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12년간 민사판례연구회 회장을 맡았고, 정년퇴임을 하면서 자리를 넘겼다. 1977년 만들어진 민사판례연구회는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산실이기도 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과 김황식 전 국무총리, 김용덕·김소영 대법관도 이 연구회 출신이다. 윤 교수도 전임 민사판례연구회 회장인 양창수 대법관 후임이 거론될 때마다 항상 ‘0순위’로 꼽혔다. 실제 2012년에는 대법관후보 추천위원회가 윤 교수를 후보로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인사검증에 동의하지 않고 고사했다. 결국 양 대법관 이후 학자 출신은 2016년 김재형 대법관이 명맥을 이었다.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이미 나이가 60을 넘겼고, 누가 추천해도 안하겠다고 해서 넘어갔어요. ‘나의 때는 지났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윤 교수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불신’ 문화를 부정하지 않고 문제를 접근한다. 지난해부터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을 맡은 윤 교수는 내년까지 법조시장 공정성 전반을 점검하는 업무를 총괄한다. 사건 수임과 수행 과정에서 의뢰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는지 감독하고, 징계나 수사를 의뢰하기도 한다. ‘전관예우’로 대표되는 법조시장 불신 문제도 연구한다.

윤 교수는 “실제 전관예우가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며 사람들이 있다고 믿고있는 점을 전제로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트러스트(신뢰)’라는 책이 있어요. 한국과 이탈리아는 신뢰가 낮은 사회, 일본과 독일은 신뢰가 높은 사회라고 했죠. 사법에 대한 불신은 문화 전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령 미국에선 아직도 수표를 많이 쓰거든요. 수표를 어떻게 믿고 쓰냐고 교포들한테 물어보니 부도나면 그로 인한 불이익이 크다는 거예요. 그러니 부도낼 생각을 못해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잘 안 쓰죠.”

윤 교수는 앞으로 유치권 제도를 재정비하고, 상속에서 배우자의 지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공사대금 분쟁으로 건물을 점유하는 유치권 행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부동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경매 가격이 떨어집니다. 유치권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판사들도 있어요. 개정안을 강하게 주장했고 정부도 공감을 해서 국회에 개정안을 냈는데 못고쳤어요. 민법을 고친다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평균 수명이 늘면서 재혼을 하는 사례도 늘고, 상속 문제도 그만큼 복잡해진다. 윤 교수는 “아주 원만한 가족 같으면 상속을 어떻게 하건 부모를 모시겠지만, 법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라며 “이혼해서 재산분할 받는 것보다 상속받는 게 오히려 불리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재산분할은 많게는 재산의 반도 받을 수 있는데, 상속은 자식들과 나눈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50%를 더 받는 데 그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법조인으로, 학자로 걸어온 길을 돌아봤을 때 특별히 아쉬운 점이 없다고 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없지 않지만, ‘이만하면 감사하다’는 게 그의 마음가짐이다. “지금 젊은 분들을 보면 굉장히 경쟁이 치열하죠. 우리 세대에는 그렇게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가 운이 좋았고, 축복을 받고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좌영길 법조팀장·안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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