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감독 정재일, 소리꾼 김준수 인터뷰
그리스 비극과 만난 판소리…‘트로이의 여인들’
아시아의 음악극…배우 한 명에 악기 하나 조화
‘파멸의 근원’ 헬레네는 유일하게 서양 악기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극…영혼 토해내는 소리에 울림 받을 것”
국내외 어벤저스 팀이 만난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헬레네 역을 맡은 김준수(왼쪽)와 음악감독 정재일은 이 작품에 대해 “아름다운 한글로 쓴 그리스 비극으로, 온전히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국립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압도적인 비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켰다.’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
2년 전, 유럽 3개국(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투어를 마치자 찬사가 쏟아졌다. 무대에 선 김준수는 “한국에서보다 더 큰 환호에 창극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돌아왔다”고 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었다. 3000년 전 그리스 비극이, 트로이 여인들의 절규가 우리 소리의 ‘한’과 만나자 창극은 완전히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극’이라며, ‘보편성’도 확보했다.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3일 개막,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이 돌아온다. 국내 공연은 2017년 11월 이후 3년 만. “사실 금의환향하려는 그림이었어요.(웃음)” 정재일 음악감독의 이야기에 아쉬움이 담겼다. 올 한 해 파리 샤틀레 극장과 뉴욕 브루클린음악원(BAM)에서의 공연이 예정됐지만, 코로나19로 취소됐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트로이의 여인들’은 일찌감치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을 기록하며 관객과 만날 준비를 마쳤다. 개막을 앞두고 정재일 음악감독과 헬레네 역을 맡은 김준수(국립창극단)를 만나 ‘트로이의 여인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 ‘기생충’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은 정재일 음악감독(왼쪽)과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이자 국악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김준수 [국립극장 제공] |
▶ “음악감독은 통역사”…배우 한 명에 악기 하나 조화=‘트로이의 여인들’은 국내외 ‘어벤저스’ 팀이 만든 대작이다. ‘판소리를 흠모한’ 싱가포르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옹켕센이 중심에 섰고, 극작가 배삼식이 대본을, 전통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안숙선이 작창을 맡았다. 영화 ‘기생충’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은 전방위 뮤지션 정재일이 작곡과 음악감독으로 함께 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음악감독은 별 볼 일 없어요.” 정재일 감독은 “역할이 별로 없더라도 너무나 하고 싶은 작품”이었다는 말로 몸을 낮췄다. “저는 각자의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훌륭한 분들의 어시스턴트랄까, 혹은 통역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대본, 작창, 연출에 제가 조금씩 양념을 친 거예요.”
정 감독와 안숙선 명창, 옹켄센 연출의 만남은 ‘음악극’으로의 창극의 아름다움을 되살렸다. 한 명의 배우는 하나의 악기와 짝을 이뤄 서사를 끌어간다. “판소리는 북으로만 반주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어요. 옹켄센 연출은 외국인임에도 핵심을 꿰뚫더라고요. 서양식 작곡과 악기들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판단에 배우 한 명과 악기 하나의 콘셉트를 유지했어요.”
작품은 에우리피데스의 원작 ‘트로이 전쟁 3부작’ 완결편을 바탕으로 그리스와 스파르타 연합군의 전쟁에서 패망해 그리스 노예로 끌려가기 직전의 트로이 여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렸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는 거문고,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빼앗기는 안드로마케는 아쟁,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는 대금, ‘파멸의 씨앗’인 헬레네는 피아노와 짝을 이뤘다. 악기의 특성과 배역을 맞추는 과정은 ‘실험의 연속’이었다.
“성악가들과 여러 실험을 했어요. 거문고는 같은 현악기인 가야금에 비해 화려하지 않아요. 낮은 소리에 기교를 부리지 않고, 한 소리 한 소리에서 우직함과 강인함이 느껴져 여성들을 대표하는 헤큐바에 어울린다고 판단했어요. 대금은 어떤 때는 평온한 바람 같다가, 어떤 때는 불에 타는 느낌이에요. 공격성이 느껴지는 소리죠. 복수심에 불타는 카산드라를 표현하기에 적합했어요.” (정재일)
“전통 악기 중 가장 진한 악기”이자 “계면(단조)를 가장 슬프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라는 아쟁은 자식을 잃은 안드로마케의 마음을 담았고, 아쟁 못지 않게 “구슬프면서 가녀린 악기 해금”은 안드로마케의 아들 아시티아낙스를 대변했다. ‘잠들지 못하는 혼령’ 고혼을 맡은 안숙선은 “무속적 느낌을 내기 위해 징으로만 표현”했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파멸의 근원인 절세가인 헬레네는 성별이 달라졌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적인 존재로 김준수가 열연한다. [국립극장 제공] |
▶ ‘파멸의 근원’…중성인 된 ‘절세가인’ 헬레네=‘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헬레네가 갖는 위치는 특별하다. 모든 ‘비극의 시작’이자, ‘파멸의 근원’인 절세가인 헬레네는 이 작품에서 특별히 공을 들인 배역이다.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는 여성 소리꾼의 역할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트로이의 여인들’에선 ‘창극계의 아이돌’ 김준수가 맡았다. 남성 소리꾼이 헬레네를 맡자 존재의 의미가 달라졌다. “헬레네는 하나의 에너지이자 태양같은 존재”(정재일)로 “남성이나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중성적인 인물”(김준수)이 됐다. “어디에서 속할 수 없는 헬레네의 처지”(김준수) 역시 중성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헬레네는 극 안에서 유일하게 서양 악기와 짝이 됐다. “작창도 하지만, 전과는 완전히 다른 피아노 반주”(정재일)가 김준수의 힘 있는 남성적인 소리와 어우러진다. “작곡을 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법”(정재일)으로 선택한 악기가 피아노였다.
“여성 역할을 맡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막막함도 있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비주얼에 대한 걱정도 많았죠.” (김준수) 초연 당시보다 4kg이 늘어난 탓에 현재는 체중 조절도 한창이다. 많은 ‘트로이의 여인들’ 중 유일하게 팔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어야 해서 막판 다이어트에도 돌입했다. “저녁 식사는 샐러드”로 연명하는 날들이다. “연출님이 살 빼라는 이야기는 안 하는데, 샐러드만 먹고 있다고 하니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공연 때까진 최대한 먹고 싶은 것을 자제하고 있어요.(웃음)”(김준수)
가장 중심은 소리다. 김준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기에 보이는 것에 대한 부담은 내려놓고, 온전히 노래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북 장단이 아닌 피아노에 소리를 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휘몰아치는 피아노 반주를 따라 시김새가 이어지는 헬레네의 소리는 그것 자체로 새로운 창극의 길을 열어준다. “감정과 상황에 집중”(김준수)한 소리는 김준수만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정재일)을 만들어낸다.
“정재일 감독님이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워낙에 높아 소리꾼이 노래를 할 때 이질감이 들지 않게끔 길을 잘 만들어주셨어요.” (김준수)
정 감독의 음악에는 경계가 없다. 국악 기반의 월드뮤직 밴드 푸리 활동은 물론 대중음악과 영화 등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넘나드는 시도가 꾸준히 이뤄졌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정 감독은 두 음악을 유연하게 넘나들며 소리꾼들이 “자신있게 부를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전통음악은 작곡가의 음악이 아니라 퍼포머의 음악이에요. 전통음악에서 악보는 정말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그것대로 부르면 망하죠.(웃음) 소리꾼의 시김새가 들어가면 전혀 다른 음악이 돼요. 작곡가로서 전통과 함께 할 때 접근하는 태도는 서양 작곡처럼 수직적인 게 아니라 길만 제시하는 거예요. 그 안에서 달리고 뛰고 걸을지, 어디로 갈지는 퍼포머들이 정하죠.”(정재일)
정 감독은 다만 “현대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전통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했고, 통일성을 가지는 것에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성악의 강렬함은 어떤 악기도 뛰어넘을수 없다고 생각해요. 헬레네의 노래는 (김)준수 씨가 변형을 많이 줬고, 거의 같이 작곡했다고 봐도 무방해요.”(정재일)
공연을 앞두고 하루에 10시간씩 연습에 매진하는 김준수의 고민도 묻어났다. “재연을 하면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라오잖아요. 아쉬움이 있다고, 판소리 작창처럼 시김새를 짓이겨 더 입힌다거나 욕심을 내기도 해요. 지금은 오히려 덜어내려 하고있어요. 담백하고 편안하게 부르는데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김준수)
▶ 한글로 적힌 ‘트로이의 여인들’…“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극”=‘트로이의 여인들’은 여러모로 강렬한 작품이다. “아름다운 한글로 쓰여진 그리스 비극”(정재일)과 판소리의 만남이라는 파격, 성(性)을 바꾼 세기의 미녀 헬레네의 반전, 소리꾼들의 한 맺힌 절규…. 비극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카타르시스는 판소리가 어우러져 더욱 독특하게 다가온다.
올해 공연은 ‘트로이의 여인들:콘서트’(12월 12일)로 마무리된다. 지난 공연들 당시 헬레네의 피아노 연주를 직접 했던 정 감독이 진두지휘하는 무대다. “대략적인 드라마는 살리되 솔로이스트는 압축하고”, 이름없는 트로이의 여인들인 “코러스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보일 수 있도록”(정재일) 꾸민 무대다. OST에 담긴 오케스트라 버전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 정 감독은 ’트로이의 여인들’의 매력 중 하나로 전쟁의 비극 속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들었다. 콘서트에선 보이지 않았던 여인들이 주인공이 되고, 연주자들이 그에 “버금가는 위치”(정재일)에서 관객과 만난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극이에요. 창작 판소리임에도 다섯 바탕 중 하나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판소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에요. 소리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에 무대 위에 선 사람들이 굉장히 돋보여요. 소리꾼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영혼을 토해내는 소리에 울림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정재일·김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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