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정조 움직인 조선의 테크노크라트 위백규 [남도종가]
라이프| 2021-04-06 08:20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장흥 천관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존재고택은 팔방미인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터전이라는 존재감을 자랑한다.

장흥위씨 존재고택 문간채에서 바라본 옥련정과 천관산 [남도일보 제공]
존재 위백규의 동상 [남도일보 제공]

우리나라 실학은 당위성을 설파하고 경제과학을 발달시키는 이론과 영역을 전하데에만 100년 이상을 보내다가 실학자가 손수 테크노크라트가 되어 과학과 상공업을 진흥시킨 때는 18세기 중엽 위백규(1727~1798) 이후로 보면 된다. 위백규 이후 정약용, 정학유 등 실천하는 실학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위백규는 6세에 글을 짓고, 8세에 대학·주역을 공부했으며, 10세에 제자백가를 섭렵한뒤 천문·지리·복서·율력·병법·의약·관상학·기술까지 꿰뚫었던 천재다. 17세부터 강학을 했다. 25세에는 충청도에 있던 병계 윤봉구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에 몰입했다. 존재공은 41세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종가 옆에 지어 경세의 방책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존재는 1794년 어사 서영보의 천거로 정조대왕 앞에 나가아 명을 받는다. 위백규 저서 24권을 바치게 하고 그에게 국정의 자문을 구한다. 존재가 정조에게 올린 정책건의서는 바로 ‘만언봉사’다.

만언봉사에는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시라, 어진 사람을 발탁 등용하시라, 염치를 장려하고 기강을 회복하시라, 선비의 습관을 바르게 제어하시라, 탐관오리를 의법처리하시라, 옳은 제도 살려내고 폐단 법제 고치시라” 등에 대한 실천 논리가 제시돼 있다. 정조는 이에 감탄해하며 “그대의 건의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는 요지의 답서를 내렸다. 그는 옥과(곡성)현감에 발탁돼 선정을 펼쳤다.

세계지리서 환영지 [웅천공파종가 종손 위재현 제공]

정조가 탐독한 24권에는 우리나라 최초 세계지리서 ‘환영지’, 천관산 일대 역사·문화·지리 기술서 ‘지제지’, 폐단과 개혁방책을 논한 ‘정현신보’ 등이 포함돼 있다.

장흥위씨는 16세기 성균관 진사 위곤 이후 고려 왕 셋을 낳은 공예태후의 생가터에 살게 된다. 5남 위덕후의 둘째아들이 웅천(여수)현감을 지낸 위정렬이고, 그의 고손자가 위백규이다. 1836년 위윤조는 부모님의 휴식을 위해 해송(효자송:천연기념물 제356호)을 심었는데, 지금은 높이 12m, 너비 26m로 자랐다.

효자송. 높이 12m, 기둥 밑둘레 4.5m, 너비 장축 26m. [남도일보]

가훈은 ‘행동 삼가, 친족 돈독, 어른 공경, 집안 화목, 후손 교육, 경조 중시, 향약 엄수’이다. 사치를 경계하고 베풀어 봉사하는 전통을 만든 기반이다.

고려시대 회주목 치소(장흥 통치기관)였던 방촌마을은 산성으로 둘러싸인 전통문화마을이다. 존재고택에는 안채, 사랑채, 사당, 문간채, 헛간채, 행랑채, 우물터, 장독대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옥련정에는 공부를 방해하는 개구리를 부적으로 퇴치했다는 설화가 있다. 시조는 신라 선덕여왕때 위경, 중시조는 고려 시중 위창주라고 종가 대동보는 적고 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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