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서울이 뉴욕처럼 될 수 있다” 탭댄스 1세대가 그린 ‘한국화’
라이프| 2021-07-29 11:19
‘1세대 태퍼’인 김길태 단장의 꿈은 더 큰 미래를 그린다. 다음 세대를 위한 탭댄스 무대를 만들어 대중예술로의 확장을 이루고, ‘탭댄스의 한국화’를 꿈꾼다. 사진=박해묵 기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쉴 새 없이 바닥을 두드리는 경쾌한 리듬. ‘아리랑’에 맞춰 진동하는 마법 같은 발재간에 눈치도 없이 심장이 요동친다. 김길태 탭꾼탭댄스컴퍼니 단장이 연출한 ‘탭꾼 아리랑’의 한 장면. ‘미국 국적’의 서양춤이 한국을 만난 ‘절묘한 순간’이다.

누구도 밟지 않은 땅이었다. 거창한 마음도 아니었다. “동네에 탭댄스 학원을 차리면 소소하게 먹고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들인 “취미 생활” 20여년. 그의 이름 앞엔 ‘선구자’라는 수사가 붙는다. 대한민국 탭댄스 1세대. 김길태 단장의 걸음 걸음엔 이정표가 세워졌다.

▶ 운명이 된 우연 같은 만남...1세대의 길= ‘삶의 방향’은 어느 한순간 다른 곳으로 향했다. ‘우연 같은 만남’이 운명이 됐다. 보건복지부에서 홍보 영상을 만들던 청년 김길태는 난데없이 ‘안정된 직장’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향했다. “작정하고 일 년 정도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떠난 길이었어요.” 그 때가 1997년. 1년으로 예정했던 여행길은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겸하며 5년으로 늘었고, 그 사이 취미생활로 ‘탭’을 만났다.

어쩌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김 단장의 몸엔 이미 ‘춤꾼 유전자’가 있었다. 그의 형은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출신인 와이즈발레단의 김길용 단장이다.

물론 탭댄스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잘 추지도 못하고, 배우러 가면 뻘쭘하고.... 그러다가도 학원 문을 나서면 다음 레슨을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미국 생활 만 5년 동안 일자리는 수차례 바뀌었지만, 탭댄스를 대체하는 것은 없었다. ‘운명’이라기엔 거창해도, ‘스파크’가 튄 것만은 분명하다.

“타고난 꾸준함과 호기심”이 원동력이었다지만, ‘일편단심’을 유지한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순정일지도 모른다.

“취미가 특기가 됐을 무렵”이었다. 2001년 9·11테러로 일자리를 잃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 돌아와선 마포에 터를 잡았다.

마포는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대한민국 ‘탭댄스의 성지’. 다른 이유는 없다. ‘리듬탭 선구자’인 김 단장의 등장과 함께 나온 수식어다. 2003년 합정역과 상수역 사이 탭댄스 스튜디오를 오픈, 이후 10여년간 제자를 키우며 업계에 몸담았다. 김 단장을 거친 제자들이 수두룩하다. 뮤지컬 배우를 포함해 현역으로 활동하는 탭댄서가 150여명. “그 중 70~80% 정도가 제자들이에요.”

김 단장과 더불어 2000년대 초반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는 탭댄서들이 속속 등장하며 한국 탭댄스는 전환점을 맞는다.

“그 무렵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열심히 달려왔던 전문 태퍼들을 통해 탭댄스의 발전이 이뤄졌어요. 경쟁하고, 어울리며 함께 성장할 수 있던 시기였어요.”

▶ “더 많은 무대·한국화”...‘밥벌이 태퍼’의 꿈=‘밥벌이의 무게’는 직업을 막론한다. 때론 지겹고, 때론 이로운 ‘밥벌이의 어려움’은 인내이기도, 좌절이기도 하다. 김 단장도 스스로를 ‘밥벌이 태퍼’라고 말한다. “제자들 중에 프로 탭댄서가 되겠다고 하면 가급적 말리는 편이에요.” 직업인 탭댄서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김 단장이 향하는 길과 꿈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의 발자취는 10년마다 분기점을 맞았다. 한국에 들어온 첫 10년이 후학을 양성하고 탭댄스의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다면, 이후 10년은 탭댄서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든 시기다.

지금은 더 많은 태퍼들을 발굴하고 알리기 위해 페스티벌 등으로 쇼를 확장하는 때에 접어들었다. 김 단장의 시선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탭댄스가 가진 한계 때문이다. “20년 전과 비교해도 탭댄스는 대중적인 춤은 아니”라는 것이 김 단장의 생각이다.

“즐기기 위해 시작”했던 탭댄스를 직업으로 삼고 나니, 대다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혔다. “실력을 떠나 주목받는 사람이 있고, 실력은 좋지만 구경만 해야 하는 사람도 있어요. 실력이 부족해 설 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우연과 운이 만나지 못한 경우인 거죠. 제 경우는 우연이 이어졌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는 ‘운’이라고 하지만, ‘바깥의 시선’은 다르다. 완벽한 준비와 탄탄한 실력, 탁월한 기획력이 탭꾼이자 공연기획자인 김길태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김 단장에게도 탭댄스는 ‘밥벌이’였기에, 같은 길 위에서 꿈을 꺾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컸다. 끊임없이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 단장이 자비를 들여 마포문화재단과 함께 꾸미는 국내 유일의 서울탭댄스페스티벌도 그 중 하나다.

“이 분야는 문이 너무 좁아 기회가 한정돼 있어요. 거창한 책임감이 아니라,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1세대 태퍼’가 꾸는 꿈은 더 먼 미래를 바라본다. 다음 세대를 위한 탭댄스 무대를 만들어 대중예술로의 확장을 이루고, ‘탭댄스의 한국화’를 그려간다.

그는 “탭댄스도 흑인들이 유럽 백인들의 춤을 흉내내다 미국의 민속춤이 된 것처럼 우리도 탭댄스를 우리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탭꾼 아리랑’, ‘탭꾼 풍물’ 등의 시도로 이미 첫 발을 디뎠다.

“지금 우리 문화의 모든 흐름엔 한국적인 것이 녹아있고, 그만큼 자신감도 커지고 있어요.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한국만의 탭댄스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탭댄스가 마이너인 서울이 뉴욕처럼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이미 역량을 갖춘 태퍼들이 있고, 우리만의 것으로 예술의 경지에 오른 춤꾼들이 더 많이 나오리라 생각해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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