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단독] 5060도 ‘보피 알바’…감쪽같은 사업자등록증에 속는다 [인간 대포통장]
뉴스종합| 2021-10-19 15:23
인간 대포통장 〈1부 - 만들어진 공범〉 ④
58년생 정씨, 교도소에 들어가다
정일훈 씨가 채용담당자와 나눈 대화. 그럴싸하게 만든 사업자등록증까지 제시하고 있다.

정일훈(63·남) 씨는 7년을 울산의 조선소에서 협력업체 소속 ‘보온공’으로 일했다. 집채만 한 배 속에 씨줄 날줄로 퍼진 배관에 보온재를 붙이는 노동이었다. 선박을 기어다니다시피 하면서 보온재를 덮는 건 고역이다. 그래도 일감은 풍부했고 꾸준히 소득이 들어왔다. 몇 년 전 불어닥친 조선업 불황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호시절은 끝났다. 하청업체를 나와 일용직으로 보온공 일을 이어갔지만 일거리가 부족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화물차 운전, 인체실험, 쿠팡 배송…. 그는 눈여겨본 구직 공고 목록을 작성했다. 거기엔 ‘SBI솔루션’도 적혀 있다. 생활정보지 ‘교차로’에서 유심히 봐둔 업체명이었다.

SBI솔루션의 채용담당자는 정씨와 연락하면서 “채권 추심업무”라고 소개했다. 사채를 끌어와서 하는 불법적인 일은 아닌지, 제3자가 돈을 받아 입금하는 이유는 뭔지 등을 정씨가 꼼꼼히 물었더니 “고객들이 이미 신용불량이 돼서 통장 압류되고 현금으로 할 수밖에 없다. 고려신용정보에서 위탁받은 회사”라고 설명했다. 동래세무서장 직인이 찍힌 사업자등록증까지 보여줬다.

그것은 취업의 허울을 쓴 범죄 심부름꾼 모집 광고였다. 그는 경찰에 붙잡혔고 검찰로부터 ‘보이스피싱 조직과 공모한 공동 정범’이라는 취지로 기소(사기 혐의)됐다. 1심 재판부는 공소 사실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정씨는 지난해 9월 진주교도소에 미결수로 수감됐다. 피고 측은 “형이 너무 과하다”고, 검사 측은 “형이 약하다”고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정씨의 변호인은 현재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일러스트=권해원 디자이너]

정씨와 같은 중장년층들이 보이스피싱에 연루돼 붙잡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헤럴드경제가 확보한 서울지방경찰청의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검거보고서 분석자료를 보면, 2020년 4월~2021년 3월에 붙잡힌 피의자 578명(서울지방경찰청 관내) 가운데 40대 이상 가담자는 240명(41.6%)으로 집계됐다. 이 시기는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보다 앞선 시기엔 40대 이상이 이렇게 많지 않았다. 2018년 2월~2020년 3월에 검거된 현금수거책 559명을 연령대로 분류했을 때 40대 이상 피의자는 15%에 그쳤다. 현금수거책으로 가담했다는 이유로 붙잡힌 사람 10명 중 7명은 20~30대였다. 2~3년 전만 해도 보이스피싱 심부름꾼 노릇은 비교적 젊은 층에서 많이 했다면, 2020년 2분기가 지나면서 연루되는 이들의 연령대가 높아졌다.

[권해원 디자이너]

검거보고서를 분석한 홍순민 서울광진경찰서 강력팀장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알바) 광고를 엄청 때리고 있다. 코로나19로 수입이 엄청나게 줄어들고 수입이 불규칙한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라며 “‘쉬운 일이다. 수금하는 일이다. 일당은 최저 시급보다 많이 쳐주겠다’는 내용으로 현혹한 결과로도 보인다”고 말했다.

중장년층이든, 청년층이든 보이스피싱 행동책으로 엮이는 배경은 ‘취업’이다. 당장 일자리가 절박한 이들이 보이스피싱 일당이 쳐둔 거미줄에 걸린다. 다만 20~30대가 취업정보를 알바몬, 알바천국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구인구직 플랫폼에서 찾았다면,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교차로, 벼룩시장 같은 생활정보지를 통해 취업정보를 접한다.

지면 형태의 생활정보지에 실린 구직광고 가운데 보이스피싱 관련 허위 공고로 의심되는 사례들.

보이스피싱 수금책을 모집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광고들은 대개 ‘단기/장기 배달 알바모집’ ‘단순배송 구함’ 따위의 제목을 달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슨 업무를 담당할 것인지는 대체로 명시하지 않는다. ‘초보 환영’ ‘나이 무관’ ‘일급 지급’ 등의 문구로 일단 유인한 뒤 유선이나 카카오톡 등을 통해 구체적인 업무를 설명하며 포섭하는 구조다.

이원일 변호사(법무법인 하진)는 “생활정보지 한 부를 펼치면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는 광고가 8, 9개쯤 된다”며 “교차로 같은 익히 알려진 매체에 불법적인 광고가 실리리라곤 생각지도 못하는 맹점이 있다”고 말했다.

[헤럴드경제 디지털스토리텔링 : 인간 대포통장]

졸지에 사기범죄의 ‘공범’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나 수백~수천만원의 현금다발을 받아 어딘가로 입금했습니다. 수사기관은 그들을 ‘현금수거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총책과 범행을 공모했다는 죄를 묻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는 102명의 보이스피싱 공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15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이 범죄자로 연루되기까지의 배경, 어떻게 일했고 붙잡혔는지를 파악했습니다. 대부분은 가짜 취업 공고에 속아 ‘그 일’에 엮였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취업준비기간을 보내던 청년, 코로나19로 일터에서 밀려난 구직자, 단지 세상경험 쌓으려 알바를 찾았던 대학생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피해자와 사회는 그들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범죄인 걸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설계자들이 짜놓은 판은 지독하리만큼 교묘합니다. 피해자들을 감쪽같이 속이듯이 자기들의 수족 노릇을 할 사람도 철저히 기망합니다. 정작 보이스피싱 본체는 막대한 수익만 삼키고 법망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공범이 된 이들의 허물없음을 대변하려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는 한순간에 피해자-피의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기록입니다. 동시에 보이스피싱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을 비난하고 강하게 처벌하는 게 최선인지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헤럴드경제의 ‘인간 대포통장’ 기획은 3부에 걸쳐 보도됩니다.

[프롤로그]

[단독] 보이스피싱 ‘공범’ 몰렸다 실종된 아들,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부]

① ‘살아있는 대포통장’ 된 그들…절반 이상이 2030

② 보이스피싱 ‘꼭두각시’로 쓰이다 버려진 사람들

③ “엄마, 그냥 교도소 갈게”…22살 아들이 보이스피싱 ‘낙인’ 찍혔다

헤럴드 디지털콘텐츠국 기획취재팀

기획·취재=박준규·박로명 기자

일러스트·그래픽=권해원 디자이너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nyang@heraldcorp.com
dodo@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