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보이스피싱 피의자 57%, “위기에 도움받을 ‘관계자본’ 없었다” [인간 대포통장]
뉴스종합| 2021-10-22 17:31
인간 대포통장 〈2부 - 범죄자 낙인 〉 ③
보이스피싱 피의자 102명 설문조사
보이스피싱 피해자와 수거책이 만나서 돈을 건네받는 장면을 재연배우를 통해 연출했다. 최재원 사진작가

보이스피싱 피의자로 연루된 이들의 절반 이상이 이른바 ‘관계자본’이 취약한 상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기관에 붙잡히더라도 가족 외에 마땅히 도움을 구할 곳이 없어서 홀로 대응하거나 온라인 공간에 의지한 이들도 10명 중 4명이었다.

헤럴드경제는 이들의 개인적, 사회적 배경과 정서적 영향을 파악하고자 네이버 카페 ‘보이스피싱 피의자’ 회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8월24일~9월3일)를 벌였다. 104명이 참여했고 중복응답(2명)을 제외한 102명(사건 당사자 91명·가족 11명)의 응답값을 분석했다. 설문조사 분석 과정에서는 장동호 남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과)가 도움을 주었다.

대출 혹은 일자리가 필요해서

응답자 가운데 38명(37.3%)은 일자리를 찾았던 이유로 ‘일을 하고 있었으나 소득 부족했음’을 이유로 들었다. 추가 일거리를 찾다가 소위 가짜 구인정보를 접한 것이다. 응답자의 22.5%는 ‘기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고 답했다. 8.8%는 ‘정규직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임시직을 물색했다고 했다.

이들이 접한 구인정보는 누구나 알만한 구인구직 플랫폼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네이버 밴드·카페,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같은 SNS 채널에서도 평범한 일자리로 포장된 ‘가짜정보’가 널려 있다.

응답자들이 피의자가 된 주된 배경은 대포통장 제공(44.1%)과 현금 수금책(31.4%)이었다.

대포통장(계좌정보 제공)은 여러 경로로 촉발된다. 대개는 대출을 빙자한 사기다. 금융사 명의를 내세워 ‘신용대출 가능’ 문자를 뿌린 뒤 걸려든 이에게 “적용금리를 낮추려면 신용점수를 높여야 한다. 계좌정보를 알려달라”고 구실을 대 체크카드나 통장비밀번호 등을 제공하는 식이다. 계좌정보를 넘기고 그게 보이스피싱에 이용되면 통장 소유자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는다.

현금 수금책은 채권추심, 부동산경매업체 보조 등의 정상업무로 알고 일을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나 돈을 수거해 전달핞 역할을 한 경우다. 대부분 사기, 사기방조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다.

빈약한 사회관계

설문에 응한 피의자들에게선 빈약한 ‘관계자본’도 공통점으로 발견됐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가족 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56.9%(58명)가 “없다”고 했다.

이는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생활비 등이 절실한 상황에서 가족의 조력이나 제도권 대출을 이용할 수 없다면 일수 같은 사채에 손을 대기 쉽다. 또한 허위 구직정보에 적힌 ‘고수익 알바’, ‘단기 업무’, ‘일당 지급’ 같은 문구에도 취약해질 수 있다.

장동호 교수는 “재무적 의사결정은 통상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면서 “청년일수록 고립된 이들이 많고 그러면서 혼자 (위험한) 의사결정하는 사례가 많아진다”고 말했다.

응답자의 45.1%(46명)은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뒤 직계가족이나 친인척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고 답했다. 17.6%는 온라인(SNS 게시판, 채팅 등)에 도움을 구했다고 했고, 14.7%는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답했다.

▷‘친구·선후배’(7.8%) ▷변호사(7.8%) ▷현재 또는 과거 직장동료(1.0%) 등에게 SOS를 쳤다는 응답은 10%에 못 미쳤다.

사회적으로 가라앉는 사람들

보이스피싱 피의자로 엮인 뒤 사회적 관계에 변화가 있었습니까?”라는 설문 문항에 응답자 41.2%(42명)가 ‘매우 축소됐다’고 답했다. 취재팀은 ‘코로나19가 퍼진 이후로 사회적 관계가 변화했는가’도 물었다. 이 질문에 매우 축소됐다고 응답한 비율은 35.5%로 첫 번째 질문보다 낮았다.

응답자들은 자괴감과 죄책감, 두려움 등이 뒤섞인 감정을 호소했다. ‘피의자=범죄자’라는 사회적 인식에 좌절했다. 하지만 억울함을 드러내긴 쉽지 않다. 수천만원을 잃은 엄연한 피해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 가담자도 엄벌한다’는 현재의 형사정책적 기조에서는 일단 피의자로 입건되면 처벌을 피하긴 어렵다.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 관계마저 단절하는 양상을 보인다.

정승환 고려대 법무대학원장은 “낙인찍혀서 사회관계 속에서 부적응한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응답자의 34.3%는 주변에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주관식)엔 “(사람들에게) 범죄자로 여겨질까 걱정됐다”, “너무 부끄럽고 사회의 범죄자란 꼬리표를 달게 됐다”, “가족과 일부 지인에겐 얘기했지만 다른 이들은 범죄자란 선입견 가질까봐 말 못했다” 등이라고 적었다.

취재팀이 심층인터뷰 한 피의자들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황을 호소했다. 때문에 설문조사 말미에는 불안장애 평가 척도(GAD-7)와 우울증 선별검사 척도(PHQ-9)을 담아 응답자들에게 자가평가를 요청했다.

GAD-7은 7개 질문을 주고 응답별로 점수를 다르게 매겨 총점(0~21점)을 매긴다. 이번 설문에선 응답자 가운데 78.42%가 10점 이상의 불안증상을 겪은 것으로 평가됐다. 총점이 10점 이상이면 불안증상이 주의가 필요한 과도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PHQ-9 역시 총점이 10점을 넘기면 치료를 고려할 수준으로 판단한다. 이 평가에선 76.47%가 10점 이상이었다. 응답자의 22.54%는 최고점인 27점을 기록했다.

장 교수는 “보이스피싱 행동책에 엮인 이후 사회적 관계가 크게 축소된 청년들일수록 그렇지 않은 청년들에 비해 특히 불안감과 우울감이 크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헤럴드경제 디지털스토리텔링 : 인간 대포통장]

졸지에 사기범죄의 ‘공범’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현금다발을 받아 어딘가로 입금했습니다. 수사기관은 그들을 ‘현금수거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총책과 범행을 공모했다는 죄를 묻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가짜 취업 공고에 속아 ‘그 일’에 엮였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취업준비기간을 보내던 청년, 코로나19로 일터에서 밀려난 구직자, 단지 세상경험 쌓으려 알바를 찾았던 대학생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피해자와 사회는 그들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범죄인 걸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설계자들이 짜놓은 판은 지독하리만큼 교묘합니다. 피해자들을 감쪽같이 속이듯이 자기들의 수족 노릇을 할 사람도 철저히 기망합니다. 정작 보이스피싱 본체는 막대한 수익만 삼키고 법망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공범이 된 이들의 허물없음을 대변하려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는 한순간에 피해자-피의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기록입니다. 동시에 보이스피싱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을 비난하고 강하게 처벌하는 게 최선인지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프롤로그]

보이스피싱 ‘공범’ 몰렸다 실종된 아들,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부]

① ‘살아있는 대포통장’ 된 그들…절반 이상이 2030

② 보이스피싱 ‘꼭두각시’로 쓰이다 버려진 사람들

③ “엄마, 그냥 교도소 갈게”…22살 아들이 보이스피싱 ‘낙인’ 찍혔다

④ 5060도 ‘보피 알바’…감쪽같은 사업자등록증에 속는다

[2부]

① 보이스피싱 ‘무죄’ 받았지만…신경안정제는 못 끊는 이유

② “비대면면접과 개인정보 요구, 보이스피싱 알바입니다”

헤럴드 디지털콘텐츠국 기획취재팀

기획·취재=박준규·박로명 기자

일러스트·그래픽=권해원 디자이너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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