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탱고 즐겨 추던 ‘모던보이’ 유영국, 그의 산은 가족이었다
라이프| 2022-07-01 11:51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유영국은 탱고를 즐겨 추는 모던보이였고, 아내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들려주는 로맨티스트였다. [국제갤러리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송민도, ‘나 하나의 사랑’)

그는 ‘모던보이’였다. 탱고를 즐겨 췄다. 그 춤은 어떤 춤꾼 못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인 김기순 여사에겐 탱고 장르의 노래를 종종 불러줬다.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이다. 유영국의 20주기 기념전 ‘컬러스 오브 유영국(Colors of Yoo Youngkuk, 유영국의 색채)’을 찾은 둘째 딸 유자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는 이 곡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자주 듣던 노래라서…” 20년이 지났지만, 그의 마음에 아버지는 여전히 굳건한 산이었다.

유영국(1916~2002)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굽이진 산중에 박혀, 들고 나는 이도 거의 없는 울진이 고향이다. 오지에서 자란 소년은 1938년 일본 도쿄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하고 현지에서 활동하다 1943년 귀국했다. 해방 전후의 삶이 녹록친 않았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어선을 몰았고, 양조장을 경영했다. 그가 전업작가로 활동한 것은 1964년 48세가 되었을 때다.

유영국의 이름이 미술계를 넘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 몇 해 사이다. 특히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에 그의 작품이 포함되고, MZ세대 미술애호가인 방탄소년단 RM이 유영국의 작품 앞에서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오면서다. 유영국은 이른바 ‘RM투어’ 전시 목록에 포함돼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가 됐다.

유영국, ‘Mountain’ [국제갤러리 제공]

유영국 작품의 주요 소재는 산이다. “바라볼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RM의 SNS를 통해서도 명언처럼 알려졌다. 무엇보다 유영국의 “창발적 색면 추상”(이용우 홍콩중문대 문화연구학 교수)은 MZ세대를 사로잡았다. 화사한 색감과 두터운 물성, 완전한 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회화작은 SNS의 작은 사진으로 보기에도 시선을 끈다.

4년 만에 열리는 유영국의 개인전은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의 K1~K3까지 전관을 할애해 그의 예술세계를 담았다. 회화 68점, 드로잉 21점을 비롯해 작가의 활동 기록을 담은 기록물이 채워졌다. K1에선 1950~1960년대 초중반 작품, K2에선 1970~1990년대 전업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을 담았다. K3에선 1960녀대 중후반~1970년대 초기작을 보여준다. ‘시간의 길이’를 품어온 작품들이 풍기는 아우라가 온화하다. 화사하고 쨍한 원색의 회화 작품도 세월을 품어 깊이를 더해간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팅을 담당한 이용우 홍콩중문대 문화연구학과 교수는 “제작 연도로는 후대 작품들이지만, 유영국의 화업에서 가장 ‘젊은 작품’은 1960∼1970년대 작품들”이라며 “유영국이 작가로서 가장 의기가 넘쳤던 시기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1964년 첫 개인전 이후 ‘전업작가’로의 삶을 시작한 유영국은 그 때부터 극도로 절제된 삶을 살았다.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11시 30분까지 작업을 하고, 30분간 점심 식사를 한 뒤 휴식을 취하고, 다시 12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이 시기의 작품은 기하학적 성격이 뚜렷하다. 스스로에게 집중해 절제된 조형언어와 색채 변주가 도드라져 나타나는 시기다.

유영국이 부인 김기순 여사와 함께 본 사과나무를 그린 'Work'(1977) [국제갤러리 제공]

1970년대 이후 작품들은 심장박동기를 달고 25년간 투병 생활을 하며 완성했다. 오랜 투병 중에 완성한 작품들은 평화롭고 서정적이다. 이 교수는 “죽음의 문턱에서 삶으로 회귀하기를 반복한 작가의 투병 생활 끝에 탄생한 회화들은 완벽한 평행 상태를 은유하듯 따뜻한 생의 빛으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유영국의 작품 세계와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이 전시는 작가의 정체성은 물론 예술적 의의까지 만나볼 수 있다. 그의 걸음을 따라가는 곳곳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만나게 되는 이들은 가족이다. 그가 일생을 천착해 온 자신 안의 산은 바로 가족이었다.

유영국을 향한 가족의 지지와 사랑, 부인 김기순 여사의 한없는 헌신은 지금의 그를 존재하게 됐다. 아내를 향한 마음은 그림으로 이어진다. 유영국은 1977년엔 영주 부석사에서 아내와 함께 본 사과나무 두 그루(‘Work’)를 그렸다. 가만히 어깨를 맞댄 듯 나란히 선 빨갛고 노란 나무와 그 둘을 감싼 녹색의 산이 포근하고 고요하다.

이 교수는 “김기순 여사는 남편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물끄러미 지켜보셨다고 한다”며 “이 전시에선 유영국이라는 작가를 지탱해준 가족의 존재를 들여다보고, 아내인 김기순 여사가 남편을 바라보는 시각을 함께 담았다”고 말했다. 전시는 8월 21일까지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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