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주름살 없던 시절 만나 30여년”…50대 여배우들의 ‘다시, 봄’
라이프| 2022-10-04 09:58
‘평균 연기 경력 30여년, 도합 220년’의 서울시뮤지컬단의 50대 여배우 7명 왕은숙, 권명현, 오성림, 임승연, 박정아, 박선옥, 이신미가 그들의 진짜 삶을 담은 이야기 ‘다시, 봄’으로 뭉쳤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내 인생으로 말하자면 참 길어. 보통 10대는 꿈이 제일 많을 때잖아. 난 꿈이 없었어. 유일한 낙이 있다면, 합창단에서 노래한 거, 대학가요제에서 노래한 거. (중략) 나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교사일 열심히 하면서 버텼다. 나, 나를 추앙하며 살거야.”

새빨간 수트를 차려입은 ‘다혈질’ 은옥의 대사에 ‘40여년의 시간’이 흐른다. 그럭저럭 버틴 10대, 삶의 소중함을 발견한 20대, 집안일에 직장생활에 먹고 사느라 바빴던 30~40대, 그러다 마주한 여성의 50대는 복잡한 나이다. 엄마로, 아내로, 사회인으로 살아오다 ‘나’를 돌아볼 틈은 없었고, 어느 순간 세상에서 조금 비껴나 있다. 곁에 남은 건 불청객 같은 갱년기 증상뿐인 ‘50대 그녀’들이 ‘다시 봄’을 맞고 있다.

서울시뮤지컬단 ‘다시, 봄’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시도되는 ‘디바이징(Devising)’ 뮤지컬이다. 대본이 없는 상태에서 배우들의 실제 삶을 기반으로 극이 만들어졌다. ‘디바이징 뮤지컬’은 모두에게 낯선 시도였다. 이기쁨 연출은 “아직 뮤지컬 계에 디바이징이라는 개념이 모호해 공연성을 가지기 위해 어느 정도, 어떤 부분까지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관객들이 쉽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대중적 코드에 대한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다.

‘평균 연기 경력 30여년, 도합 220년’의 서울시뮤지컬단의 50대 여배우 7명 왕은숙, 권명현, 오성림, 임승연, 박정아, 박선옥, 이신미가 ‘다시, 봄’으로 뭉쳤다.

서울시뮤지컬단 디바이징 뮤지컬 ‘다시, 봄’[세종문화회관 제공]

배우들은 지난 5월부터 창작진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신상 털이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주어진 대본을 받아 각자의 해석으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우 왕은숙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우리 이야기를 털어놔야 하나 고민했다”며 “자신의 인생이 드라마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사건 없이 흘러온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오성림은 “그동안 꺼낸 적 없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과 거부감이 있었다”며 “그래도 솔직할 수 있었던 건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선 나부터 리얼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배우들과의 인터뷰, 강원도 화천에서 열린 창작 워크숍을 통해 만난 50대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는 7명의 사연으로 태어났다. 이기쁨 연출가는 “배우들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토대로 인물의 성격과 관계성을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공연성을 획득할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어갔다”고 말했다.

갱년기 안면홍조로 인해 메인 앵커 자리에서 밀려난 진숙(왕은숙),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승희(임승연), 싱글맘 성애(오성림) 등 7명은 인생의 중턱에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99.8% 우리의 이야기”(이신미)에 “약간의 상상”(박정아)과 “극적 재미”(오성림)를 더했다고 한다. 배우 이신미는 “실제로 혼자인 삶을 작품 안에도 녹였다”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이야기를 했는데 완성된 대본을 받고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서울시뮤지컬단 디바이징 뮤지컬 ‘다시, 봄’[세종문화회관 제공]

몇 해 전 교통사고로 후유증을 겪는 수현을 연기하는 배우 권명현은 화천에서 만난 50대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무대로 가져왔다. 그는 “실제의 삶을 표현할 때마다 무게감이 크게 다가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연기를 할 때마다 먹먹해져 감정 조절에도 신경쓰고 있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자신의 이야기이다 보니 굳이 ‘대본 분석’의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연출의 방향성도 확고했다. “객관성의 유지”였다. 이 연출가는 “관객들은 아직 극과 감정에 닿지 못했는데 배우들 스스로 감정에 매몰될 수 있는 우려도 있기에 현장에서 객관적으로 다가서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작품 속 넘버 역시 평상시 노래방에서 부르는 스타일을 반영해 완성됐다. 오성림은 “기존 뮤지컬과 달리 각자의 삶을 리얼하게 다룬 만큼 창작진이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원했다”며 “뮤지컬 배우로서가 아닌 자신으로 돌아가 표현하는 모습이 작품에도 묻어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봄’은 50대에 접어든 서울시뮤지컬단 중년 여배우들에게도 특별한 작품이다. 7명의 배우들은 서울시뮤지컬단에서 짧게는 25년, 길게는 35년을 함께 했다. 배우 박정아는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하던 시절, 무대에서 발이 안 보일 정도로 뛰어다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나의 젊은 시절을 공유한 이 사람들과 50대가 돼 다 같이 한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 우리에겐 큰 의미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뮤지컬단 디바이징 뮤지컬 ‘다시, 봄’[세종문화회관 제공]

지금의 뮤지컬 시장에서 50대 여배우의 위치는 나날이 줄고 있다. 2030 여성 관객이 주도하는 시장에선 이들을 겨냥할 ‘스타 남자배우’ 중심의 작품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봄’은 획일화된 뮤지컬 시장에서 그간 소외됐던 관객과 배우를 불러온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왕은숙은 “요즘의 뮤지컬 시장은 2030 남자 배우에게 집중돼 있고, 이들을 보러오는 젊은 여성 관객들의 회전문 관람이 보편적인 흐름이 됐다. 5060 세대가 볼 만한 콘텐츠는 많지 않았다”며 “이 작품은 50대 이상 배우들이 모여 50대 이상 관객들이 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화려했던 청춘을 보내고 맞은 삶의 중턱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현재이고, 누군가에겐 미래다. 박선옥은 “내 인생을 뒤로 미루고 저마다의 삶을 살아온 50대들이 이 공연을 보러 오면 저마다의 변화를 맞게 될 것”이라며 “인생 2막을 내다보면서, ‘인생 별 거 없다’고 유쾌하게 수다떨 수 있는 힐링 뮤지컬이다”라고 했다. 이기쁨 연출가는 “‘다시, 봄’은 화려한 청춘을 보내고 인생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다시 ‘인생의 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하는 이야기”라며 “동년배에겐 힘과 위로를, 젊은 세대에겐 나의 엄마, 누나, 언니의 이야기로 다가서며 세대를 넘나드는 공감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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