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명품 간판, 바뀐 거 알았어?”…브랜드 ‘로고 미스터리’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라이프| 2023-03-26 11:27
버버리가 지난달 공개한 2023년 가을·겨울 컬렉션. 버버리가 새로 선보인 로고 디자인을 패턴으로 사용한 의상을 입은 모델(왼쪽). 새로운 로고 디자인(오른쪽). [버버리]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누군가의 첫 인상이 각인되기까지, 단 3초면 충분하다.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 인사를 건네는 표정, 옷 매무새, 신체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동시다발적으로 '완전체'가 되어 머릿 속에 이미지로 꽂힌다.

브랜드도 똑같다. 사람의 이름과 얼굴만큼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게 바로 '로고'다. 그런 로고를 바꾼다면? 그건 틀림없이 역사적 사건이다. 이름값 나가고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가 이미 '헤리티지(유산)'가 된 로고를 구태여 바꾸는 속내는 뭘까? 바꾼 뒤 이전보다 못하다는 혹평을 받은 브랜드 로고들엔 대체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까? '브랜드 로고'의 세계,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보자.

“뭐가 더 나아요?” 이름 빼고 다 바꾼 버버리…20세기 로고 되살린 이유
‘이퀘스트리언 나이트’(Equestrian Knight, 말 탄 기사) 패턴 의상을 입은 모델. 기사가 든 깃발엔 ‘앞으로’를 의미하는 라틴어 'Prorsum'도 적혀있다. 버버리의 최고가 컬렉션을 뜻하는 버버리 프로섬(PRORSUM)의 기원이다. [버버리]

올들어 명품 브랜드 업계의 시선은 마침내 베일을 벗은 버버리로 쏠렸다. 보테가 베네타를 심폐소생술 한 뒤, 숨돌릴 새도 없이 버버리로 자리를 옮긴 다니엘 리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C)의 첫번째 컬렉션이 지난달 20일 공개됐기 때문이다.

버버리 로고 변천사. 2023년 새롭게 공개된 로고는 알파벳 B가 새겨진 깃발과 방패로 무장한 채 앞으로 돌격하던 버버리의 상징 '이퀘스트리언 나이트'를 재등장시켰다. 새 로고의 글꼴은 강렬하면서 깔끔한 고딕체 스타일에서 보다 날렵하고 감성을 자극한 명조체 스타일로 바뀌었다. [버버리]

1986년생 젊은 피로 무장한 다니엘 리는 낡은 버버리 로고부터 바꿨다. 발망이나 발렌시아가 등 B로 시작하는 다른 브랜드와 엇비슷해 보였던 경직된 로고부터 메스를 댔다. 여기에 이전 로고 리뉴얼 과정에서 사라졌던 ‘말 탄 기사’ 이미지도 추가했다. 과거 레드나 블랙을 사용했던 로고는 산뜻한 블루 계열로 다시 태어났다.

세리프(Serif, 장식) 서체 로고를 산-세리프(Sans-Serif·장식 없는)체로 교체한 브랜드들. 왼쪽은 교체 전 로고, 오른쪽은 교체 후 로고다.

바뀐 버버리 로고에서 눈에 띄는 건 돌아온 ‘이퀘스트리언 나이트’(Equestrian Knight, 말 탄 기사) 문양이다. 지난 2018년 MZ세대를 공략한다며 로고에서 싸그리 지워버렸던 패턴을 패션쇼 의상 패턴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명품 르네상스'에서 뒤쳐졌던 브랜드의 가치를 부활시키기 위해 122년 전인 1901년 공모전에서 우승했던 버버리의 간판 얼굴을 복권시킨 것이다.

새롭게 바뀐 로고는 소비자의 마음도 움직였다. 새 로고를 처음 선보인 2023 가을·겨울 패션쇼 영상은 버버리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조회수 578만회를 기록했다. 역대 버버리 컬렉션 가운데 가장 높은 조회수다.

영상 댓글 중엔 “옛날 로고가 돌아오길 기다렸다”는 내용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루함'을 탈피하려다 장점인 '클래식함'까지 매장시킨 버버리가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구관이 명관’ 오명 쓴 로고 리뉴얼…돌아온 버버리처럼 셀린느도?
셀린느 로고 교체 전(왼쪽)과 후(오른쪽).

명품 로고의 '몰개성 암흑기'는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명품 브랜드 로고가 하나 둘 비슷해졌던 건 2018년 무렵이다. 수 십 년을 지켜왔던 로고 스타일을 버리고,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고딕체 스타일 로고로 바꾸기 시작했다. 일명 '산-세리프(Sans-Serif·장식 없는)체' 시대가 열리면서 알파벳 첫머리가 같은 명품 로고들은 죄다 비슷해 보이기까지 하는 부작용을 냈다.

산-세리프(Sans-Serif)체는 장식이 없는 글꼴이란 뜻이다. 대표적인 서체는 한국어로 보면 굴림체나 돋움체 같은 고딕체 계열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글씨의 굵기가 같은 단순한 형태다.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해 극강의 심플함을 추구, 산세리프 계열에 속하는 글꼴들은 시각적 차이를 두드러지게 할 수 없는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셀린느·캘빈클라인의 로고 교체 전(왼쪽)과 후(오른쪽).

프랑스 명품 브랜드 셀린느(CELINE) 역시 2018년 고딕체 로고에 차별성을 부여했던 ‘É’에서 악센트를 빼고 자간을 좁혔다. 이 선택은 셀린느 로고가 속옷 브랜드로 유명한 미국의 캘빈클라인과 엇비슷해졌다는 평가의 도화선이 됐다. 개성없는 고딕체 서체에 ‘C’로 시작하는 ‘대문자’로만 구성된 로고는 시각적으로나 미학적으로 큰 차별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셀린느 로고가 대문자 고딕체로 바뀌기 전 기존 로고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만든 SNS 계정 'old celine'. [@oldceline 인스타그램]

이같은 변화에 가장 질색한 건 기존 셀린느 팬층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기존 로고가 찍힌 제품을 살 수 없다는 ‘비보’를 듣자마자 ‘올드 로고’ 제품을 사재기 하느라 분주했다. 이들은 셀린느의 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파일로(Phoebe Philo)가 이끌었던 시절을 ‘올드 셀린느’로 칭하며 과거를 그리워했다.

이전 로고에 열광하던 고객들은 피비 파일로의 컴백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는 올해 9월 첫 개인 컬렉션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셀리는 역시 파일로의 성패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 그의 성공이 향후 셀린느 리뉴얼에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된다.

‘고딕체’ 반기는 사람도 없는데…대체 왜 바꾼 거야?
한글 '나눔고딕 스퀘어'(산세리프)와 '나눔명조'(세리프) 서체의 비교. 디스플레이에서 작은 크기로 표시돼도 완전히 읽을 수 있는 서체로 적합해 낙점된 게 고딕체 스타일의 산세리프였다. 이전까지 사용된 서체들은 세리프(Serif, 장식) 계열이 많았다.

소비자도 당황케 한 명품의 로고 변신, 어쩌다 이렇게 우후죽순 생겨났을까? 로고 디자인 암흑기를 불러온 원흉은 뜬금 없지만 '스마트폰'이다.

명품 업계는 "젊은 세대가 사용하는 작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화면에서 가독성이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서체 디자인을 단순화하다보니 ‘그 로고가 그 로고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종이로 된 인쇄물보다 TV·스크린, 모니터,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주로 이용하는 젊은 소비층을 겨냥해 브랜드의 주목도와 독이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로고 변신을 꾀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에 맞춘 로고 리뉴얼 작업은 지나치게 ‘효용’에 집중한 나머지 명품이 가진 고유의 ‘전통과 심미성’을 떨어뜨렸다는 직격탄을 맞았다.

구글, 에어비앤비, 스포티파이, 핀터레스트, 다음의 기업 로고(CI) 교체 전(위) 후(아래) 디자인.

명품업계가 산세리프체를 결정하게 된 배경에는 IT업계의 변화도 있다. 고딕체 로고 유행이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은 디지털 전쟁의 최전선인 '빅테크' 업계였다. 구글을 필두로 2010년대에 로고 리뉴얼이 우르르 이뤄졌다. 디지털·모바일 환경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기울이는 업계에서 가장 먼저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낸 셈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1987년부터 사용했던 기울인 글꼴 형태의 로고를 2012년 교체했다. 구글도 2015년 로고를 교체하며 “스마트폰, 스마트워치 등 화면이 작은 기기를 통한 접근이 늘어나는 변화에 맞춰 로고를 수정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질세라' 국내 브랜드도 새단장…빈폴부터 이니스프리까지
빈폴 브랜드 CI 변천사. 달라진 로고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변화는 사라진 바퀴살이다. 빈폴의 상징이기도 했던 ‘페니 파싱(Penny Farthing·앞바퀴가 큰 자전거)’를 유지하되 바큇살 부분을 덜어내 현대적 감성으로 단순화했다. [삼성물산]

이같은 흐름은 국내 브랜드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지난 몇 년 간 눈길 끈 국내 브랜드 로고 리뉴얼 사례는 삼성물산의 대표 패션 브랜드인 빈폴이다. 빈폴은 30주년을 맞이한 지난 2019년 디자이너 정구호를 필두로 리브랜딩에 나섰다. 빈폴의 경우 로고는 물론 이름 빼고 다 바꾸는 전면적인 변화를 단행했다. 브랜드는 물론 콘셉트와 디자인, 매장까지 아우르는 대변신이었다.

자전거를 탄 클래식 한 차림의 '신사'는 캐주얼한 복장의 '청년'으로 탈바꿈했다. 영국 신사를 연상케하는 톱해트(top hat·높고 상부가 평평하며 테두리 넓은 챙이 달린 서양모자) 차림에서 캡모자(cap·머리 모양에 맞게 납작하게 제작하고 앞부분에 챙이 달린 모자)로 바뀌었다. 자전거 탄 자세도 달라졌다. 꼿꼿한 상체를 앞으로 동그랗게 기울여 역동성을 부각시켰다.

이니스프리 브랜드 로고 교체 전후. [이니스프리]

국산 로드샵 코스메틱 브랜드인 이니스프리도 지난달, 2018년 이후 5년 만에 로고 리뉴얼을 단행했다. 기존에 사용했던 소문자 세리프체 로고를 대문자와 소문자를 섞어 고딕체 느낌 로고로 바뀌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시선은 엇갈렸다. 새롭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그간 이니스프리가 고수해 온 내추럴한 이미지와 새 로고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비슷한 초록색에 산세리프 서체를 쓰는 네이버 ‘라인(LINE)’과도 비슷해 “자회사 같다”는 반응도 나왔다.

떨떠름한 고딕체 대유행, 대체 언제까지?
페라가모 로고 교체 전후. [페라가모]

지난해엔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도 필기체 스타일 로고를 단순한 고딕체 계열로 바꿔 '낯설다'는 원성을 샀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라는 풀네임도 '페라가모'로 줄였고, 소문자 역시 모두 대문자로 통일해 디자인이 간소화됐다. 지난 3월 부임한 디자이너 맥시밀리언 데이비스(Maximilian Davis)의 시작을 알리는 리뉴얼이다.

이같은 명품 로고의 변화에 대해 이가희 윤디자인그룹 TDC 디자이너는 “산세리프체는 현대적이고 모던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글씨의 굵기가 동일하고 장식이 없이 단순해 디스플레이에서 아주 작은 크기로 표시돼도 읽을 수 있는 장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면서도 “산세리프 유행이 길어지다보니 예전의 수요들이 다시금 올라오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브랜드 입장에선 옛날 느낌 로고를 소환하면서 과거 팬들을 모객할 수 있는 전략이 된다. 디자이너가 교체되는 시점은 새로운 취향에 맞게 로고 리뉴얼에 나서기에 좋은 모멘텀”이라고 덧붙였다.

진화를 거듭하는 디스플레이 성능 역시 세리프 서체의 부활에 유리한 대목이다. 이 디자이너는 “헬베티카 등 세리프 서체가 환영을 받은 건 디스플레이 환경에서 잘 구현되기 때문”이라며 “이제 세리프 서체까지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버버리 로고도 잘 보면 ‘하이브리드 계열’의 세리프체로 볼 수 있다”면서 “살짝 세리프의 느낌을 준, 산세리프와 세리프의 중간 정도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산세리프의 간결함 vs 세리프의 개성. 소비자들은 어떤 글꼴의 로고를 선호할까. 여전히 깔끔하고 단순한 산세리프체일까, 아니면 장식으로 개성을 더한 세리프체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하이브리드(잡종·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요소를 둘 이상 뒤섞음)’를 고대할까.

유행은 돌고 돈다. 그냥 도는 게 아니라 진화를 거듭한다. 명품 로고의 변화는 시대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얼마나 빨리 소비자의 트렌드가 바뀌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뀐 거 알았어?"란 말이 무색하게 "또 바뀌었어?"의 초고속 시대다. 전통과 고집의 대명사인 '명품'도 초조하긴 마찬가지다.

kace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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