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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애플워치보다 30년 먼저 나왔다고?” 어디서 만들었나 봤더니
뉴스종합| 2023-05-26 18:50
세이코엡손이 1982년 개발해 선보인 손목시계 ‘TV워치’. 김현일 기자
1983년 개봉한 영화 ‘007 옥토퍼시’에 등장하는 세이코엡손의 손목시계. [유튜브 ‘Sonic Tonic’]

[나가노(일본)=김현일 기자] 1983년 개봉한 영화 ‘007 옥토퍼시’에는 지금의 애플워치를 연상케 하는 손목시계가 등장한다.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큐(Q)박사가 개발한 정사각형 시계 화면으로 실시간 중계 영상을 보며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놀랍게도 이 시계는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소품이 아니라 실제로 시중에 판매됐던 제품이다.

지난 23일 일본 나가노현 스와시에 위치한 엡손(EPSON) 본사 내 ‘모노즈쿠리 박물관’에서 그 실물을 직접 볼 수 있었다. ‘TV워치’라는 이름의 이 시계는 세이코(SEIKO)가 1982년 12월 출시한 제품이다. 디스플레이 크기는 1.2인치로, 삼성전자 ‘갤럭시 Z플립4’의 커버 디스플레이(1.9인치)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다.

엡손 일본 본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알라스타 본 매니저는 “세계 최초의 TV 시계”라면서 “지금의 스마트워치 시장이 형성되기 약 30년 전에 나왔으니 시대를 너무 앞섰다”며 아쉬움을 보이기도 했다.

세이코엡손이 1982년 개발해 선보인 손목시계 ‘TV워치’와 수신기. 김현일 기자

시계 옆에는 손바닥 크기의 수신기(리시버)가 놓여져 있는데 영상을 보려면 반드시 이 수신기를 들고 다녀야 했다. 세상에 너무 빨리 등장한 이 시계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작은 TV’로 기네스북에 남아 있다.

엡손은 우리나라에서 프린터와 프로젝터 브랜드로 친숙하다. 그러나 모태는 1942년부터 시작된 세이코의 시계 사업에 두고 있다. 1985년 시계를 만드는 스와 세이코샤와 자회사 신슈 세이키(현 엡손)가 합병하면서 지금의 세이코엡손이 됐다.

이날 동행한 후지이 시게오 한국엡손 사장은 “‘일단은 시도(try)해보라’는 것이 세이코엡손의 문화”라며 “덕분에 유니크(독특)한 제품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엡손은 파격적인 시도로 최초의 길을 걸었다. 이날 박물관에선 엡손이 개발한 또 다른 최초의 제품들을 볼 수 있었다.

세이코엡손이 1982년에 선보인 세계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 ‘HC-20’. 상 좌우에는 미니 프린터와 미니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자리하고 있다. 김현일 기자

지금의 노트북을 연상시키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 ‘HC-20’은 1982년에 출시한 것으로 무게가 1.6㎏이다. 상단의 작은 모니터 왼쪽에는 미니 프린터가, 오른쪽에는 미니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깨알 같이 자리하고 있다.

‘핸디 가라오케’라는 이름의 제품 역시 눈에 띄었다. 마이크를 비롯해 스피커, 볼륨조절 스위치, 에코조절 스위치 등이 모두 한 몸으로 된 장치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블루투스 마이크’의 원조로 볼 수 있다.

세이코엡손의 휴대용 가라오케 장비. 요즘 흔히 사용하는 ‘블루투스 마이크’의 원조로 볼 수 있다. 김현일 기자

지난 1998년 10월에는 엡손이 만든 프린터가 세계 최초로 우주로 날아갔다. 당시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에 실린 엡손의 잉크젯 프린터 ‘스타일러스 컬러 800’은 무중력 환경에서도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덕분에 우주에서 각종 실험 보고서와 문서와 사진 등 500페이지 이상을 인쇄하는 데 사용됐다.

1998년 10월 엡손의 잉크젯 프린터 ‘스타일러스 컬러 800’는 우주선에서 사용된 최초의 프린터로 기록된다. 김현일 기자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이코 시계다. 언뜻 무관해보이지만 엡손의 프린터와 프로젝터는 세이코 시계에 집약된 기술에서 비롯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세이코의 기술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됐다. 올림픽 공식 타임키퍼로 지정된 세이코 시계는 육상 종목 등에서 선수들의 시간을 재는 용도로 활용됐다. 선수들의 시간 기록을 출력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세이코가 후속으로 개발한 것이 프린터였다.

세이코엡손이 지난 1963년 만든 시계(오른쪽)와 전자식 타이머는 이듬해 도쿄올림픽에서 공식 타임키퍼로 지정돼 사용됐다. 김현일 기자
세이코엡손이 1963년 개발한 프린터. 이듬해 도쿄올림픽에서 선수들의 기록을 출력하는 데 사용됐다. 김현일 기자

세이코 손목시계의 액정표시장치(LCD)는 오늘날 엡손의 주력 제품이 된 3LCD 프로젝터의 기반이 됐다. 3개의 LCD로 광원을 RGB(빨강·초록·파랑)로 분리한 뒤 프리즘을 통해 다시 합성해 스크린에 투영하는 3LCD 프로젝터는 색감을 보다 선명하게 구현하는 것이 강점이다.

‘동방의 스위스’를 꿈꾸며 일본 나가노의 작은 마을 스와에 뿌리를 내린 시계 산업은 이처럼 창립 81년이 된 지금 엡손이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 자양분이 됐다.

엡손은 시계를 조립하던 로봇 기술을 발전시켜 산업용 로봇 시장에도 진출했다. 오가와 야스노리 세이코엡손 대표이사는 “현재 상업용 로봇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언제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식품 영역 등 점차 비즈니스를 확장해 나가려는 노력과 검토는 하고 있다”고 밝혀 지속적인 도전을 예고했다.

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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