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일반
“관용기도 수리 못 해”…유럽의 병자 된 독일[원호연의 PIP]
뉴스종합| 2023-08-20 10:01
안나레나 베어복 독일 외무장관이 관용기 고장으로 호주 순방을 취소한 뒤 본 공군기지에 도착하고 있다. [AP]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독일이 관용기 고장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안날레나 베어복 외무장관이 호주 방문을 취소하는 망신을 당한 가운데 25년 전에 이어 독일이 또다시 ‘유럽의 병자’로 추락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코노미스트 지는 최근 2000년대 초 일련의 개혁을 통해 황금기를 맞이했던 독일이 성장의 후발주자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보도는 국제통화기금(IMF)를 인용해 유럽은 올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면서 특히 독일은 향후 5년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보다 더 느리게 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사실 독일의 경제 사정이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1999년과 비교해 더 나쁜 것은 아니다. 통일 직후였던 당시는 경직된 고용 시장과 수출 둔화 등으로 독일 경제는 복합 위기를 겪었고 실업률은 두자릿 수로 치솟았다. 반면 오늘날 실업률은 3% 정도이며 독일 경제는 당시보다 더 부유하고 개방적이다.

하지만 현재 독일인들은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독일인 5명 중 4명은 여론조사에서 독일이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고 답하고 있다. 독일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연쇄적으로 연착되는 일이 빈번해지자 이웃 국가 스위스는 연착 열차의 운행을 금지하기도 했다.

독일의 추락은 성공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노동 및 연금 개혁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하르츠 개혁’에 성공한 뒤 메르켈 정부에서 독일은 유럽연합(EU)의 리더로 떠올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기술을 바탕으로 수출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후 수년 동안 독일은 오래된 산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지만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는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집착으로 철도와 연방군 뿐 아니라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도 지나치게 적어졌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보기술(IT) 투자 비율 미국과 프랑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관료적 보수주의도 걸림돌이다. 사업을 운영하기 위한 면허를 취득하는데 평균 130일이 걸리는데 이는 OECD 평균의 두배에 달한다.

지정학적 위기는 독일에 닥친 위기의 근원이다. 독일이 주요 서구 경제대국 중 중국 의존도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양국간 교역액은 314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독일 자동차 브랜드는 중국 경쟁 브랜드와의 시장 점유율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서방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디리스킹(탈위험화)’를 추구하면서 핵심 광물 등 일부 민감한 분야에서는 아예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 각국 정부는 첨단 제조 및 공급망 강화를 위해 보조금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광범위한 공급망을 바탕으로 비교우위를 가져온 독일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도 독일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독일의 산업 분야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지만 더이상 저렴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할 수 없다. 전력망에 대한 투자 부족과 느린 허가 시스템은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방해하고 있으며 제조업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재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2차세계 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향후 5년 동안 200만명 이상 은퇴할 예정이다. 고용주의 40%는 숙련 노동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베를린에선 자격을 갖춘 교사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약 110만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유치했지만 이 중 대부분은 어린이와 비근로 여성이다.

문제는 1990년대 슈뢰더 연립 정부와는 달리 정치권이 개혁에 쉽게 나서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으로 구성된 현정부는 연정 내 분열이 심해 해결책 합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전국적으로 20%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내년 일부 주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제기되자 기존 정당은 급진적인 변화에 더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지는 “예전 방식을 고수하고 싶은 유혹이 있겠지만 독일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도전의 물결을 잠재울 수도 없을 것”이라며 “금리가 낮았던 2010년대처럼 자유롭게 정부가 지출을 할 수는 없겠지만 지출 억제를 위해 투자를 포기해선 안된다”고 조언했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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