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다정한 남편이 잠 들면 공포가 깬다
라이프| 2023-08-28 11:26

남편은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사랑스럽다. 만삭인 아내를 끔찍하게 챙기고 따뜻한 애정 표현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잠만 자면 다른 사람이 된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가 하면, 생고기를 입 안에 마구 집어넣기도 한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 ‘잠’은 신혼부부인 현수(이선균 분)와 수진(정유미 분)의 일상을 덮친 수면 장애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잠’은 지난 5월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다.

현수는 부부의 일상을 괴롭히는 그의 렘(REM) 수면행동장애를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별 차도를 보이지 않자 수진은 점점 예민해진다. 특히 아이가 태어난 이후엔 남편이 아이를 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광기에 가까운 불안감을 보인다. 거들떠보지 않았던, 친정 엄마가 건네준 부적이 어느 순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영화는 공포 스릴러의 모습을 갖췄지만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잠이란 일상적 소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탈바꿈하는 연출은 대담하고 신선하다.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유재선 감독은 “처음엔 몽유병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병을 앓는 환자들과 이들을 옆에서 지키는 배우자의 일상은 어떨지 궁금해졌다”며 “공포의 대상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같이 있을 수 밖에 없어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공포를 정면 돌파해야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영화는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수의 수면 장애 경험과 이로 인한 수진의 심리 변화는 공포 스릴러 그 자체다. 러닝 타임 내내 소름을 유발하며 극한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동시에 현수가 수면 장애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은 미스터리물 성격을 띤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수면 장애의 원인을 따라가며 추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면 수면 장애를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부부의 모습은 멜로 영화다. 수면 장애가 부부 사이에 균열을 낼 법 하지만 부부는 오히려 단단한 동지애를 발휘한다. 그럴 때면 카메라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 라고 쓰인 가훈을 비춘다.

유 감독은 “현수가 수면 중에 보이는 공포스러운 행동은 호러, 비밀스러운 행동을 풀어야 하는 점에선 미스터리,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발버둥 치는 건 스릴러”라며 “부부 관계와 사랑을 다루는 점에선 또 다르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 속에 간간히 비치는 위트, 그리고 영화 내내 유지되는 묘한 긴장감은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이는 유 감독이 실제로 봉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유 감독은 봉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옥자’의 연출팀 출신이다. 봉 감독은 “최근 10년 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라며 작품을 극찬했다고 한다.

‘잠’은 유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그럼에도 신고식은 화려하다. 영화는 칸 영화제에 이어 오는 10월에는 시체스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메인 경쟁 섹션과 세계 4대 국제영화제 중 하나인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9월 6일 개봉. 94분. 15세 관람가. 이현정 기자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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