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작곡가 류재준 "척박한 세상 모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 [인터뷰]
라이프| 2023-08-29 09:20
작곡가 류재준이 국립합창단의 창립 60년을 맞아 위촉받아 완성한 신작 ‘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장엄미사)’가 세상에 나온다. 지난 2017년 시작, 6년을 숙성해다 마침내 때를 만난 이 곡에 대해 류재준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이라고 했다. [김재형 스튜디오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 부분에선 비올라를 끝까지 연주해주세요. 여기선 템포에 신경써 주세요.”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국립합창단 연습실. 6년을 기다린 작곡가 류재준(53)의 ‘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장엄미사)’가 마침내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와 국립합창단의 목소리가 만나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다.

‘미사 솔렘니스’는 미사(예배)곡의 형태를 빌려 콘서트 형식으로 만든 곡이다. 미사곡에서 중요한 가사들을 골라 성악을 더한다. 탄탄히 잘 짜여진 구조 위로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선 음표들이 놓인다. 편안하게 들리지만, 사실 복잡한 테크닉의 집합체다. 장조, 단조 외에도 고대 시대에 쓰던 ‘멀티 선법’을 쓴다. 그는 “곡이 완성되면 작곡가의 손을 떠난다”며 “해석은 연주자의 몫이라 연주자가 작곡가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세계 초연됐을 때도 지금 우리가 듣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을 거예요. 익숙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곡을 열 번, 스무 번 반복하며 발전시키는 것은 연주자예요. 그렇기에 연주자가 작곡가보다 훨씬 중요해요.”

이날 연습을 끝내고 헤럴드경제와 만난 류재준은 그의 신곡 ‘미사 솔렘니스’에 대해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이라고 소개했다.

인생의 암흑기에 찾아온 예술적 영감 ‘미사 솔렘니스’

‘미사 솔렘니스’의 첫 시작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2017년부터다. 해마다 사재를 털어 운영한 서울국제음악제가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고, 별안간 림프종 판정을 받아 건강은 나날이 악화됐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사실은 작곡도 포기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류재준은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소설 ‘장크리스토프’을 읽고 ‘꽂혀’ 뒤늦게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전엔 악기도 다룬 적이 없었다. 늦은 출발 탓은 그는 스스로를 “본능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네이티브가 아니라 영어를 듣고 국어로 번역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고백한다.

작곡가 류재준. [김재형 스튜디오 제공]

하지만 그는 등장부터 전도유망한 작곡가였다. 2004년 ‘타악기를 위한 파사칼리아(Pasaclaia for Percussion)’가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았고, 2006년엔 폴란드 라보라토리움 현대음악제의 위촉으로 발표한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 유럽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2008년 3월엔 폴란드 루드비히 반 베토벤 음악제에서 ‘진혼교향곡(Sinfonia da Requiem)’을 연주, 현대음악계 초유의 기립박수가 나오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유럽 유수 악단이 그를 찾았고, 2015년엔 폴란드 정부의 1급 훈장 ‘글로리아 아르티스’를 받았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선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돈을 잘 버는 작곡가였지만, ‘삶의 끝자락’이라고 느낀 때가 너무나 빨리 왔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 때 무엇을 남겨야 할까 고민을 하다 자기성찰을 통해 위로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꼽는 베토벤이 말년에 쓴 ‘장엄미사’는 이 곡의 동기가 됐다.

이 곡이 만들어진 지난 6년, 외부 세계의 일상도 엄혹했다. 그는 “극한의 사회 대립과 신냉전 시대,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얀마 사태, 지구 온난화를 겪으며 인류가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고 했다. 류재준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성찰을 담은 ‘미사 솔렘니스’에는 “어머니의 눈물”이 있다.

“작품에 가장 강력한 모티베이션이 된 것은 자식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이상 고온과 재해에 시달리는 암담함에 자식을 남겨두는 어머니들의 슬픔과 아픔이었요. 우리는 주변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알면서도 모른 척 할 때가 많아요. 그 고통을 모두 끌어안는 사람들은 어머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년을 고민한 대작 “공연장 오는 길이 행복하길…”

6년 간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악보를 그렸다. 지금까지 그가 쓴 작품 중 가장 큰 곡이기도 하다. 길이는 80분에 달한다. 류재준은 “대작을 쓰고 싶어 곡이 커진 것은 아니다”며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수록 잘 섞이면서 곡이 커지게 된다”고 했다.

그의 음악은 현대음악의 기법을 담고 있으면서도, 현대음악은 어렵다는 편견을 지워준다. 류재준의 음악관이 반영됐다. 스스로도 ‘현대음악가가 아닌 작곡가’이고 싶다고 한다. 그는 “내 음악에서 원하는 것은 연주자의 이해와 청중의 공감”이라며 “아무리 뛰어난 기법을 담는다 해도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작곡가 류재준. [김재형 스튜디오 제공]

귀를 괴롭히지 않는 음악 안에 담긴 메시지는 다양하다. 세월호 희생자를 위해 ‘마림바 콘체르토’를 썼고, ‘경비원’, ‘층간소음’, ‘외톨이’ 등의 곡을 담은 가곡집 ‘아파트’(2021년)도 썼다. 그는 “작곡가는 무언가를 선동할 수 없다. 음악을 쓰는 것은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감정과 경험의 기록”이라며 “과거의 곡을 보면 그래서인지 일기장을 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미사 솔렘니스’ 공연을 마치고 가을이 오면 그는 본격적으로 바빠진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서울국제음악제의 수장으로, 오는 10월엔 브람스를 조명하는 축제를 연다. 그에 앞서 내달 8일엔 예술의전당에서 2010년 창단한 앙상블 오푸스의 공연을 한다. 류재준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수정본과 첼로 소나타, 작곡가 최우정의 비올라 소나타와 클라리넷 소나타가 세계 초연으로 관객과 만난다. ‘미사 솔렘니스’부터 앞으로 공개된 신작들까지 그의 음악적 방향성은 늘 같은 곳에 있다.

“아름다운 곡을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즐거움이에요. 음악은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공연장까지 오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어요. 비싼 값을 주고 예매를 한 뒤, 때론 2~3시간이 걸려 힘들게 와요. 그렇게 온 이 길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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