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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에 길어올린 치유…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 [고승희의 리와인드] 
라이프| 2023-09-04 07:01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 [국립합창단 제공]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 [국립합창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상상도 못한 리듬이 고개를 내밀었다. 니체가 ‘찬란한 태양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보낸 비제의 ‘카르멘’을 떠올리게 하는 하바네라 풍의 리듬이었다. 솔로 바이올린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며 시작한 하바네라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서서히 밀고 들어와 위세를 떨치는 리듬은 거룩함을 찬미하다 이내 사라졌다. 금세 밝은 행진곡으로 옷을 갈아입고 진군이 시작됐다. ‘미사 솔렘니스(Missa Solemnis·장엄미사)’ 중 ‘상투스(Sanctus, 거룩)’에서였다. 묵직한 주제를 다룬 이 작품에서 가장 다채롭게 튀어오르는 악장이었다.

6년을 숙성한 작곡가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가 지난 31일 국립합창단의 여름합창축제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2008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악제에서 울려퍼진 ‘진혼 교향곡’을 통해 세계적인 작곡가로 자리매김한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는 삶의 끝자락에서 길어올린 곡이다. 림프종 진단을 받아 투병 중이었고, 음악활동을 해오며 안팎으로 얽힌 일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절망이 습격하듯 밀어닥치던 당시 그는 “마지막으로 남길 수 있는 곡”으로 ‘미사 솔렘니스’를 떠올렸다. 베토벤을 비롯한 작곡가들이 일생에 단 한 번, ‘삶의 증거’처럼 남기는 작품이다. 류재준에게도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가 동기가 됐다. 그는 이 작품을 “이 땅의 모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이라고 했다.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는 가톨릭의 미사 통상문을 가사로 차용, ‘키리에(자비), 글로리아(영광), 크레도(고백), 상투스(거룩), 아뉴스 데이(그의 어린양)’ 순서로 이어졌다.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 [국립합창단 제공]

류재준의 음악은 현대곡에 대한 편견을 지워준다. 대다수 현대음악은 난해함으로 채워져 진입장벽이 높다. 하지만 그의 ‘미사 솔렘니스’는 현대음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줬다.

‘키리에’는 잘 정돈된 깔끔한 선율로 시작했다. 이리저리 흩어진 음표가 난해하고 복잡하게 자리해 퍼즐 같은 현대곡과 달리 ‘자비를 베풀듯이’(‘키리에’ 중) 단순화한 선율이 이어졌다. 잘 요리된 화음이 하나씩 쌓여 감정을 증폭했다. 그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현대음악적 기법이 곡을 심심하지 않게 했다. 북유럽 고전 작곡가들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기세를 쌓아가는 바람에 휩쓸리듯 자비를 구하는 이의 간절함이 울부짖듯 이어졌다.

영광의 음악인 ‘글로리아’에선 섬세한 현악 파트가 교향곡 2악장의 서정을 품고 시작했다. 보통의 ‘글로리아’가 밝은 분위기를 담은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드높은 대상을 향한 호소가 이어지자, 소리는 한 겹 한 겹 쌓여 거대한 파도를 이뤄나갔다. 오케스트라의 장엄함은 고통과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아픔이었다.

‘미사 솔렘니스’는 미사곡의 형태를 빌려왔지만, 종교적인 의미만을 내포한 것은 아니다. 류재준은 ‘미사 솔렘니스’에 대해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내면을 가져와 자기성찰하는 것을 콘서트화했다”고 말했다.

크레도는 관악기가 삐죽 튀어나오며 시작됐다. 가장 종교적인 악장이지만, 해석의 여지는 많았다. 현대음악의 혼란스러운 화음이 이어지며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을 기다리고, 마침내 ‘부활’의 때를 만나면 그제야 화사해진 음색이 구름 사이로 솟아나는 태양처럼 길을 비췄다. 불길한 어둠은 환희와 희망의 밝음으로 향했다.

세 악장 안에서 공통된 음악적 분위기가 포착됐다. 단정한 구조 안에서 제 짝을 만난 음표들이 화음을 이루고, 그것들이 점차 확장하며 감정을 증폭한다. 고난, 절망, 불안, 회환, 희망, 환희 등 무수히 많은 감정의 휩쓸림을 차례로 꺼내와 위로하고 치유하듯 새날을 향해 나아갔다.

반전은 ‘상투스’에서 시작됐다. 하바네라 풍의 리듬이 비집고 나오며 다소 단조롭게 다가온 이전까지의 음악을 완전히 뒤집었다. ‘상투스’에선 하바네라 리듬으로 시작해 행진곡으로, 강렬하고 밝은 외침으로 이어지며 곡은 세 번의 변화를 거듭했다. 가장 변화무쌍하고 흥미로운 악장이었다. ‘아뉴스 데이’에선 다시 한 번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전음악처럼 솔로 목관 악기들이 차분하게 시작해 아름다운 소프라노 음색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매 장마다 함축된 메시지를 품었음에도, ‘미사 솔렘니스’는 이 마지막 장을 위해 달려온 것처럼 합창의 웅장함과 신성함이 음악의 주제의식을 살렸다. ‘상투스’에서의 극적인 변화를 이어받아 ‘아뉴스 데이’에서도 곡은 시시각각 달라졌다.끝을 향해갈 땐 서정적 선율로 돌아와 마침내 ‘완전한 위로’를 건넸다. 84명의 국립합창단과 시흥시립합창단, 4명의 솔리스트(소프라노 이명주, 알토 김정미, 테너 국윤종, 베이스바리톤 김재일)도 때론 섬세하고 때론 웅장한 음색과 해석으로 작곡가의 의도를 따라갔다.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 [국립합창단 제공]

류재준의 ‘미사 솔렘니스’는 코로나19로 정체된 사회와 신냉전 시대로의 돌입, 끊이지 않는 전쟁과 기후위기 등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의 이야기를 가져와 위로를 건넨다. 무거운 주제를 안은 현대음악이기에 지레 겁먹을 수 있지만, 그의 음악관은 이런 편견을 지운다.

류재준은 “내가 음악에서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자들의 이해와 청중의 공감”이라며 “음악은 기본적으로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교하게 구축된 구조 안에 섬세한 감정과 주제 의식을 담아내면서도, ‘미사 솔렘니스’의 모든 선율들이 청중의 귀에선 한 순간도 달아나지 않았다. 확고한 음악관을 가지고 자신의 자리를 구축해온 음악가의 증명이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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