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물멍·노을멍에 시 한 수 절로 나오는 ‘병산서원’
라이프| 2023-09-05 11:28
대문밖 핑크빛 베롱나무꽃과 소나무 정원, 그 앞 낙동강-강변 절벽의 조화를 이루는 안동 ‘병산서원’

“가렸지만 막지 않아, 있어도 없는 듯 하다.”

1361년 홍건적의 침략때 안동에 피란 간 고려 공민왕은 풍산 아래 풍악서당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감동해 많은 서책과 사패지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1563년 훼철된 서당을 재건립했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아 공부에 방해가 되자, 1575년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지금의 풍천면 병산리로 서당을 옮기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한다. 하회마을과는 10리 거리.

▶보물 만대루의 힐링 만으로도=풍수학자들이 “병풍 같은 강변절벽이 아름답지만 서원 앞을 막는 듯 하다”고 지적하자, 1613년 서애 선생의 위폐를 모시는 존덕사를 지을 무렵, ‘절벽을 가렸지만 절경을 막지는 않는다’는 절묘한 뜻을 담아 만대루(보물)를 세웠다.

세계유산 9개 서원은 물론 전국 800여 서원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곳에서 대문밖 핑크빛 베롱나무꽃과 소나무 정원, 그 앞 낙동강-강변 절벽의 조화를 감상하노라면 시 한 수가 절로 읊조려질 듯 하다. 이곳에 붉은 노을이 스며들면, 글 읽던 선비들은 마음을 무장해제시켜 물멍·노을멍의 힐링을 한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평소 들어가지 못하는 만대루가 문화유산 방문캠페인 덕분에 일반 국민에 열렸다.

낙동강을 내려다 보는 경사진 구릉지에 탑다운 계단식으로 존덕사, 전사청, 강의실 입교당, 기숙사 동재·서재, 고직사, 만대루, 외삼문이 들어서 있다.

2023 문화유산 방문캠페인 국민 동행 ‘병산서원 스테이’는 존덕사 묵념 부터 시작한다.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이라고 적힌 위판에 예를 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안내자 유사와 국민 유생이 서로 네 댓번 허리숙여 인사를 한다. 자세를 낮춰야 통과해야 하는 복례문에서도 이 처럼 나를 낮추는 겸양과 예절을 새삼 가다듬는다.

▶붉은 노을, 별밤, 물안개 산책=입교당과 만대루, 동재와 서재가 둘러친 중정 한복판에는 110살 쯤된 무궁화가 눈길을 끈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것이 아니라 한번 피면 사흘을 가는 ‘안동 무궁화’이다.

고직사에서, 서애의 충효당 종가 내림음식을 기반으로 서양인들도 폭풍흡입할 수 있게 개발한 ‘온휴반상’ 만찬을 즐긴 뒤, 만대루에 오르면 붉은 노을이 낙동강과 병산서원, 선비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저녁 만대루 다담(茶啖) 인문학 대화를 마치고 마당에 나서면, 병산서원 위로 가을 밤별들이 빛난다. 청정 생태와 내 몸을 잇는 공기는 속이 뚫리는 듯 신선하다.

하룻밤을 자고 난 뒤 아침 물안개가 드리워진 백록 채도대비 풍경 속으로, 하회마을 방향 유교문화길 산책을 하며, 다시 한번 황금만능 회색도시의 찌꺼기를 씻어낸다.

이곳 K-헤리티지 여행의 강력한 매력을 말해주듯 이번 패키지는 1분 만에 마감됐다. 내국인 4회, 재일동포를 포함하는 일본여행객 체험 1회가 진행된다. 내년에는 봄, 가을로 크게 늘리겠다고 한다. 세계유산에 근사한 샤워장을 두지못해 조금은 불편하지만 콘텐츠의 감동은 여느 추(秋)캉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믿고가는 공공부문의 7개 ‘방캠러’ 패키지=문화재청(청장 최응천)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병산서원 국민스테이를 포함해 7개의 문화유산 방문캠페인(방캠) 여행을 준비했다. 믿고 가는 공공기관의 여행 패키지이다.

‘산사에서 나를 찾다’는 오는 7일, ‘제주 불의숨길-배낭’은 14일, ‘바다열차X관동풍류’, ‘선교장 달빛방문’, ‘관동풍류 원정대’는 21일 예매를 시작한다.

방캠 코스인 ‘소릿길’에선 소리의 원형, 즉 우리 소리를 음향 장비 없이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릿공감’ 공연을 감상한다.

목포역을 출발해 ‘소릿공감’이 열릴 해남 우수영국민관광지로 이동하는 동안 금호고속 버스 내부에서 우리의 소리를 감상하고, 진도 용장성, 남도진성 등을 둘러보며 실경과 함께 국악을 감상한다. 태안 보물섬들의 침몰지 관장목보다 물살이 센 울돌목을 관람하며 전문가의 해설을 듣는다.

‘산사의 길’에서 진행되는 ‘산사에서 나를 찾다’는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여행이다. 통도사 불소원에 도착하면 오직 나를 위한 2시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어 청정 무풍한송길 사색을 하며 내가 나를 채운다.

‘제주 불의숨길-배낭’ 여행은 용암이 흘러 인간문명과 만나는 해안가(불의 숨길 제4구간)에서 진행된다. 세계유산축전의 일환으로 공연과 인문 도슨트가 어우러진다.

동해바다로 떠나는 ‘관동풍류의 길’ 여행패키지는 3가지이다. 공연과 해설, 삼척 죽서루 탐방까지 경험할 수 있는 ‘바다열차×관동풍류’, 달빛기행 ‘선교장 달빛방문’, 경포습지-오죽헌-경포해변을 탐방하는 ‘관동풍류 원정대’이다.

▶세계유산축전=순천갯벌에선 8월에,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선 7월에 축전을 마무리했고, 오는 9월 23일부터 10월 14일까지 수원화성, 10월 3~8일 제주에서 세계유산축전이 진행된다.

수원 축전은 ‘의궤가 살아있다: 수원화성, 이어지다’를 주제로 장안공원과 수원화성 일원에서 펼쳐진다. 왕실과 귀족 중심에서 탈피, 축성 노동자를 주제로, 전통음악-현대적 공연이 어우러지는 ‘기억의 축성’(9.23~24, 우화관), 축성 노동의 가치를 담은 공연 ‘장인의 광장’(9.30~10.14, 장안공원 야외무대)이 눈길을 끈다.

성곽 순례 인문학 여행 ‘수원 화성의 기억을 걷다’(9.23~10.14)는 기존의 야간 코스도 진행하고, 올해엔 낮 경로(코스)로를 추가했다. 북지터에서는 인문학 콘서트 ‘지혜가 피어나는 연못’(10.5~8)이 열린다. 기후변화 대응, 친환경 실천도 한다.

제주에서 열리는 ‘2023 세계유산축전 -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10.3~8)은 ‘상생: 유산과 함께 살아가다’를 주제로, 지역주민들이 주도한 3개의 대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용암의 길을 따라가는 워킹투어, 한라산-거문오름 순례, 세계자연유산 마을을 찾아서 등이 전문가의 해설, 주민들의 인심과 어우러진다.

치열한 선착순 예약을 움켜쥐지 못했다고 해서 세계가 감동하는 K-헤리티지 방캠 여행이 빛을 바래지는 않는다. 핫플레이스 구경도 좋지만, 산티아고 순례길 처럼 방문자 여권도 주는, 문화유산 탐방, 명승·민속미식 여행은 귀갓길을 뿌듯하게 한다. 안동=함영훈 기자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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