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은은 죽어 500년간 조선의 정치를 움직였다.
이상일 용인시장 ‘반도체 르네상스’ 열어…개혁의 아이콘
정몽주 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
[헤럴드경제(용인)=박정규 기자] 포은 정몽주(1337~1392)는 용인이 품고있는 최고의 역사인물이다. 용인소식 10월호를 보면 포은 정몽주 영향력과 위상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만큼 크고 방대하다고 소개돼있다. 2023년 10월7일과 8일 이틀간 용인 처인구 모현읍 능곡로 정몽주 선생 묘역에서 제 19회 포은문화제가 열렸다.
▶영일 출신 정몽주 묘소는 왜 용인에 있을까=용인 소식지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소식지에 따르면 정몽주 출생지는 영일(포항)이다. 영일에서 태어나 얼마후 영천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왜 묘소는 용인에 있을까. 그는 1392년 개성 선지교(나중 선죽교로 이름이 바뀐다)에서 죽음을 맞은뒤 다리 아래에 버려졌다. 인근 승려들이 수습해 개성 풍덕리에 묻었다. 1407년 고향 영천으로 안장하기로하고 유골을 운구해 용인 죽재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명정( 銘旌·죽은이의 관직과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날아가 현재의 묘소가 있는 산중턱에 꽂혔다. 다시 상여를 옮기려 했으나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어떤 풍수가가 나타나 하늘의 계시이니 깃발이 꽂힌 곳에 묻는것이 옳다고 권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상여가 움직였고. 지금의 묘자리(모현읍 능원리)에 묻었다고 한다. 포은이 이 자리를 택했다는 이야기다.(1985년 최상수 ‘조선민간전설의 연구(성문각) 자료 참조). 조선은 정몽주가 죽고나서 ‘의정부 영의정’이란 벼슬을 추증했다. 용인 묘소에는 원래 그 벼슬이 기록되어있는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벼락이 떨어져 무너졌다고 한다. 자손들은 이것이 조선의 관직을 새긴 것에 대한 포은의 분노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이후 ‘고려문하시중’이란 비를 다시 세웠다. 그 뒤로는 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 정몽주 묘소에 서있는 비석에는 조선이 나중에 준 벼슬이 적혀있지않다. ‘고려문하시중’만 적혀있다. 이 전설같은 일화는 이중환의 택리지( 擇里志)에 생생하게 기록돼있다.
▶정몽주는 왜 개혁의 아이콘인가=정몽주는 왜 그토록 당대와 후대의 추앙을 받아왔을까. 정몽주는 우리 역사상 모기 힘든 올라운드 플레이어이자 철학자, 개혁가였다. 요즘 말로는 ‘르네상스맨’이 적절한 단어다. 용인시는 한국의 대표적 르네상스 도시가 되기를 원한다. 그는 왕국의 체제를 설계할 만큼 뛰어난 정치철학자이자 신념과 용기로 무장한 외교가였다. 전투를 치러 승전으로 이끈 장수이기도 했다. 다른 영역에서 워낙 빼어났기에 소홀히 여겨지는점이 있지만 최고 반열에 오른 시인이었다. 알고 있는 것과 말한 것들을 투철하게 실천하는 행동가였고 최고의 지식인이다. 포은의 스승 목은(牧隱) 이색(1328~1396년)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려에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학문적 완성도도 높아서 스승인 목은 이색에게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때의 일화가 비범한데 당시 성리학 관련 서적이라고는 몇 권밖에 안되던 시절 책을 읽고 정몽주는 내용에 대한 주석을 달고 의미를 풀었다. 해설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과연 맞는 말인지를 의심했는데 후에 중국에서 성리학 서적이 대거 들어오면서 내용이 정몽주가 풀었던 내용과 거의 일치함을 알고 모두들 감탄했다.
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이 지난 7일 포은 정몽주 묘역에서 열린 포은문화제 개회식에 참석했다. |
▶정몽주와 청년 정도전=정도전은 “나라에서 과거시험을 보았을때 정몽주 선생은 삼각산에서 내려와 연거푸 3번이나 1등을 차지해 명성이 자자했다. 내가 자주 뵈러갔더니 드디어 가르침을 내려주셨는데 평소에 듣지 못 했던 것을 들었다. 정몽주 선생은 대학과 중용에서 도를 밝히고 도를 전하는 뜻을 얻어 논어와 맹자의 자세함에 조심하고 간직하며 함양하는 비결과 체험으로 확충하는 방법을 얻었다. 역경에 이르러 선천과 후천이 서로 본체와 작용이 됨을 알고, 서경에서 정일집중이 제왕의 심법을 전하던 것도 알았다. 시경에선 민이물칙 (民彛物則·사람의 도리와 만물의 법칙)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었다. 춘추에서 그 도의와 공리가 갈라지는 것을 분별하였으니 우리 오백년 동안 이렇게 이치를 지극하게 밝힌 사람이 몇명이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목은 이색이 정도전의 이런말을 듣고 “정몽주는 명쾌하고 탁월하다. 세로로 말하든 가로로 말하든 모두 맞아서 타당하지않은게 없다”고 칭찬했다. 정몽주는 오랫동안 경연관을 지내면서 임금들을 가르쳤다.조선이 시작된 이후 그는 죽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전파돼 성리학적 세계관을 왕국의 지배이념으로 삼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용인에 묻혀있는 조광조는 정몽주의 성리학 지배체제를 조선의 정치질서로 확립하는 혁신의 한 챕터를 완성한 존재이기도 하다. 조선의 왕도정치는 대부분이 고려의 정몽주가 닦아놓을 길을 넓혀간 것일고 할 수 있다. 정몽주는 조선을 만든 고려였고 죽어서 이후 500년 정치를 움직인 놀라운 성리철학자였다. 명당은 용인에 많다는 풍수지리학자의 말처럼 이름만 들어도 명성이 자자한 인물은 실제로 상당수 용인에 묻혀있다.
▶용인 시장 저주 깨졌다=역대 용인시장으로 감옥에 안간 시장은 백군기 용인시장(민주)가 유일하다. 그는 육군 대장(4성 장군)출신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 감옥행이다. 백군기 시장이 용인시장의 저주를 깨면서 용인은 놀라운 변화가 일고있다. 현 이상일 용인시장(국힘)은 300조 반도체 산단을 유치하고, 용인시 공무원과 시민들에게 찬사를 받고있다. 망친 잼버리를 회생시킨 지자체장도 이상일 시장이다. 이상일 시장 별칭은 많다. 잼버리 영웅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문예에 출중하다. 글로벌 예술 작품을 모두 알고 재능기부로 강연한다. 가곡도 부르고 노래도 부른다. 성악가 급이다. 역대 경기도지사가 해결하지 못한 고기교 상습침수 문제도 한방에 해결했다. 요즘 용인에 정몽주 혼이 깃든 르네상스 진짜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일 시장은 취임 1년만에 경기도백 출마설과 대권잠룡설마저 나온다. “용인에 살고싶다”라는 온라인 댓글도 달리기 시작했다. 용인르네상스 핵심은 반도체 융성이다. 반도체로 이상일 시장은 포은 정몽주 혼을 이어받아 전국 243개 지자체장중 1등 시장이 되어야한다. 이상일 시장은 ‘박학다식 (博學多識)’하다. 장관도 시장실로 찾아온다. 국회의원 출신에 용인특례시장 행정 경험이 합쳐져 용인서 뛰고있는 ‘포은의 심장’ 개혁혼을 이어받는 중이다. 용인소식지 10월호는 이상일 시장이 특별히 요청해 만든 포은 정몽주 특집이 가득차있다. 용인소식지는 시청 공보관실에 구독을 신청하면 한달에 한번 받아볼 수 있다. 매달 1000명씩 구독자가 늘고있다.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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