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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황진영 작가 “장현이 길채를 여러번 살려줬지만, 장현의 영혼을 구원해준 건 길채의 생명력”
엔터테인먼트| 2023-12-11 10:17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시청자에게 큰 울림을 준 사극 MBC '연인'의 황진영 작가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황 작가는 '연인' 종방연을 마치고 돌아온 날 새벽, 얼굴을 다치는 사고를 당해, 서면 인터뷰로 대체하게 됐다. 황진영 작가는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질문을 해주시고 관심을 보여주셔서 무척 기쁩니다"고 말했다.

- ‘연인’을 통해 병자호란의 조선 포로 문제를 본격 다룬 이유는?

▶병자호란 이후 끌려간 조선 포로에 강력한 이야기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슬프지만 감동적인, 안타깝지만 뜨거운 이야기들이 보물처럼 쌓여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쉽고 재미있게 풀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열심히 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끌려갔다 다시 만나는 부모 자식의 이야기가 얼마나 눈물겨울까, 자기도 포로이면서 다른 포로를 도와주고 살려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감동적일까, 포로들이 목숨을 걸고 돌아온 것이 얼마나 대단한 투쟁이고 의지인가... 등등을 생각하며, 병자호란 시기 끌려간 포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한편으론, 병자호란 시기를 다룬 기존 역사 컨텐츠에서 인조의 무능과 소현세자의 죽음, 혹은 김상헌 최명길로 대비되는 정치관의 대립을 설명하면서 수만여 포로들에 대해 다루지 않은 것에 의구심을 느꼈습니다. 기록이 부족하기에 실체를 짐작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찾아보면 환향녀에 대한 기록, 도망친 포로에 대한 기록, 포로들에 대한 조선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입장을 찾을 수 있었고, 이것을 잘 엮어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연인〉은 주인공 길채가 직접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서사를 시도했고, 길채가 결혼하고, 심양에 납치되어 포로가 되고, 속환 후 이혼하는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연인’으로 병자호란과 그이후 조선사회를 그리면서 인조를 비롯한 관료, 유학자 등 지배계층과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연인〉에서 그 시절 유학자 등 지배계층의 모습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존재는 인조입니다.

우리 〈연인〉 속 인조는 아들을 적에게 내주고 자신의 몸을 보존했다는 죄책감에 점점 내면이 뒤틀려지는 인물입니다. 처음엔 소현을 온돌방에 재워달라고 할 정도로 부성애가 있었으나 전쟁에 진 임금을 무시하는 신하들의 태도와, 부상하는 아들의 존재감에 위기감을 느끼다가 결국은 파괴되어갑니다.

그리고 이 죄책감을 숨기고자 세자가 아니라 며느리인 강빈에게 ‘개새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분노를 터트립니다.

저는 인조와 거의 판박은 듯 유사한 심리를 그 시절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유학자들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역시 돌아온 포로 여성들을 가혹하게 대합니다.

자료를 살피면서 끌려갔다 다시 돌아온 여인들을 놓고 조정에서 이혼시켜야 한다, 안된다 몇날 며칠 논의했다는 내용을 읽으며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이혼시켜야 한다는 쪽의 주장이 어찌나 당당한지, 아무리 시대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드라마에선 연준의 대사를 통해 그들의 논리를 보여주었지만, 실제 기록에서는 더욱 과격한 어조로 돌아온 포로 여인들이 왜 조선의 맑은 물을 흐리는 검은 것 한 방울인지가 구구절절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내어준 것에 대한 죄책감을 오히려 여인들이 정절을 지키지 못한 탓을 하며 내모는 것으로 씻으려 한 것입니다.

‘겁에 질린 자는 잔인해진다’는 장철의 말은 그시절 유학자들의 모습을 나름 응축한 대사입니다. 겁에 질려 잔인해진 유학자들은 돌아온 포로들, 특히 여인들을 울타리 밖으로 몰아냅니다. 그렇게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존재를 시야에서 치우는 것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잊으려 합니다.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자, 길채의 대답은 스스로 이혼하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장현은 이런 길채를 알아보았습니다.

장현이 길채를 살려준 적이 많았지만, 장현의 영혼을 구원해 준 것은 길채의 생명력이었습니다.

장현에게 길채가 어떤 의미었는지는, 장현이 소현에게 자신의 누이를 생각하며 터놓았던 속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까지 버티소서. 그것을 보면 소인, 오래전 삶을 포기한 이를 미워했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받겠나이다.’ 장현은 누이로 인한 상처를 끝까지 살아내는 길채로부터 치유받고 위로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력이 길게 이어진 포로 서사의 마지막 목적지었습니다.

-‘연인’ 종영 소감도 부탁드립니다.

▶저와 오래 함께 했던 〈연인〉을 보내기가 아쉬웠는데, 이렇게 기사로 다시 돌아보게 되어 아쉬움이 달래지는 기분입니다.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가끔 이런 스트레스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버거운 적도 있었지만, 그 순간조차 〈연인〉을 쓰고 만드는 지금이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첫 대본 리딩 때, 〈연인〉을 선택한 모든 분들이 뿌듯한 결실을 거두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넘치는 시청자분들의 사랑으로 그 소망이 이루어진 듯 해서 작가로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작가님이 대본에 표현한 각 캐릭터가 배우를 통해 얼마만큼 잘 표현됐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남궁민 - 남궁민님이 그려주신 이장현이 수많은 여심을 울렸습니다. 〈연인〉의 지독한 순정이 돋보일 수 있었던 것은 남궁민 배우님만의 매력에 빚진 바가 큽니다. 길채에 대한 장현의 사랑이 아름답게 전달되었고, 덕분에 애절하면서도 절대적인 사랑이 돋보일 수 있었습니다. 촬영 내내 보여주신 집요함과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안은진 - 안은진님의 연기는 조금 과격하게 ‘괴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년간 이어진 고된 사극 현장에서 단 한 순간도 집중력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희노애락이 펄펄 살아있는, 수십 가지 표정으로 울고 웃는 길채를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현장 스텝부터, 제작진, 시청자 모두에게 길채는 그냥 길채가 아니라 ‘우리 길채’가 되었습니다.

이학주 – 입체적인 연기로 병자호란 이후, 혼란했던 조선 지식인의 모습을 표현해주셨습니다. 드라마 전체 흐름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남연준의 위치를 정확히 캐치하고 연기해주셨습니다. 이학주님의 명철한 캐릭터 해석과 연기 덕분에 심지가 곧으면서도 유약했던, 모순된 그 시대 유자들의 모습이 잘 그려진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이다인 – 모든 순간 진심을 담아 연기해주셨습니다. 길채의 친구로서 길채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염려하는 연기는 길채를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대변해주었습니다. 특히 길채가 죽었을 것이라며 망연해하던 장면에선 은애의 고통이 전달되어 덩달아 마음이 아파졌습니다. 심지가 굳은 은애의 캐릭터를 이다인 배우님만의 아우라로 풀어주셨습니다.

김종태 – 작가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배우였습니다. 어떤 씬, 어떤 대사도 김종태 배우님이라면 다 소화해주신다는 믿음으로 인조에 대해선 매번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인조는 여러 번의 변곡점을 거쳐 마음이 파괴되어 완전한 악인에 이르는데, 그 과정을 매번 다른 눈빛, 다른 표정으로 서서히 달아오르도록, 그래서 악인임에도 그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도록 연기해주셨습니다. 김종태 배우님의 치열한 고민을 느낄 수 있었고, 악인조차도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이면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청아 –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하며 각화 캐릭터를 쌓아주셨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각화에 대한 애정과 열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때로는 서늘하고 맹렬하게, 때로는 안쓰럽고 애절한 모습으로 시청자와 만났습니다. 이청아님의 열정 덕분에 우아하고 강렬한 각화가 완성되었습니다.

문성근 – 후반부를 견인할 가장 중요한 캐릭터였고, 장철을 통해 주요한 대사들이 길게 이어져야 했는데, 문성근 배우님이 장철로 분하여 완벽하게 연기해주셨습니다. 장철에 관해 많은 고민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셨고 그 모든 고민이 장철이라는 캐릭터에 정확하게 가 닿았습니다. 문성근 배우님이 아니었다면 장철의 무게감이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일그러지는 장철의 마지막을 오히려 즐겨주시는 모습에서 대배우만의 멋이 느껴졌습니다.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최무성 – 양천은 무척이나 아끼던 캐릭터였기에 어떤 배우님을 모실수 있을까, 고대했었는데 최무성 배우님이 출연을 결정해주셨다는 소식에 덩실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구양천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품에 날아든 장현과 량음을 거두어 줄 뿐 아니라, 뒤축이 잘리고도 버려진 고아들을 품어주는 그릇이 크고 너른 캐릭터입니다. 큰 산 같은 아우라를 지니신 최무성 배우님이 양천을 연기해주셨기에 구양천이 생동감 있게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김준원 – 지적인 면모를 지닌 홍타이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김준원 배우님을 모셨고, 지적이면서도 카리스마를 겸비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를 박력있게 연기해주셨습니다. 특히 모든 대사가 만주어로 그 과정이 고되었을텐데도, 여유롭게 홍타이지를 연기해주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머릿속에 그리던 완벽한 홍타이지었기에 혹시 지문에 썼는지 확인해 본 적도 있었는데, 배우의 연기를 설명한 아무 지문이 없음을 알고 배우님의 연기력과 해석력에 경탄했습니다.

최영우 – 용골대는 무시무시한 적장이면서 돈을 밝히는 타락한 정치인인가 싶다가, 다른 한편으론 정치에 대해서도 견해가 있는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최영우 배우만의 인간적인 매력이 용골대를 왠지 정이 가는 오랑캐 적장으로 만들어준 점은 작가로서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권소현 – 〈연인〉의 시작을 강타해주신 씬 스틸러였습니다. 방두네의 활약이 없었다면 패배한 전쟁 병자호란 이야기가 훨씬 더 무겁게 그려졌을 것입니다. 후반부 스토리 진행상 분량이 줄어들자 방두네를 내놓으라는 원성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전 〈미쓰백〉에서 권소현 배우님을 인상 깊게 봤었기에 그 때와는 너무도 다른 캐릭터인 방두네를 이리도 천연스럽게 연기하시는 것을 보고 타고난 연기자시구나 감탄했습니다.

박강섭 – 박강섭 배우를 구잠으로 모시고 구잠과 종종이의 멜로를 쌓으며 무척 기대가 컸습니다. 기대대로 장현에겐 깐족대던 구잠이 종종이에게만은 상남자의 매력을 뿜어주셔서 무척 기뻤습니다. 박강섭 배우님만의 호쾌하고, 의젓한 에너지가 구잠을 더욱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럽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슬픈 이야기가 많았던 〈연인〉에 구잠이 큰 활력을 채워주었습니다.

박정연 – 제 마음속, 종종이의 명대사 명장면이 무척 많습니다. 심지어 종종이의 표정 연기에 감탄해 따로 캡쳐해 보관한 사진도 있습니다. 대단한 몰입력을 지닌 신인 연기자 박정연님이 우리의 종종이가 되어주었다니 우리 〈연인〉의 홍복입니다. 박정연 배우님이 진짜 종종이가 되어주셨기에 길채와의 우정도, 포로 시절의 고단함도, 피난 길의 고초도 살아났습니다.

김윤우 – 만주어부터, 액션, 멜로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또렷한 발음이 돋보였고, 신인에겐 버거웠을 격정적인 감성 연기도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해주었습니다. 타고난 재능인 줄 알았으나 피땀 흘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니,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량음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은 것은 김윤우 배우의 신인답지 않은 걸출한 연기력에 힘입은 바 큽니다.

-‘연인’을 통해 시청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욕심을 품었습니다.

〈연인〉에서도 장현과 길채, 그리고 두 사람과 얽힌 다양한 인물들이 살아낸 이야기를 통해, 병자호란과 포로들이 다시 생생해지기를 기대했었습니다. 장현의 사랑과, 길채로 대표되는 포로들의 생의 의지가 감동도 주고 재미도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 재미와 감동으로 마음이 포근해졌다면 〈연인〉의 목적은 넘치게 달성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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