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서울의 봄, 당신은 어느 곳 어느 계절에 살고 있습니까 [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뉴스종합| 2023-12-20 14:04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이미지[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우리같은 범인(凡人)들의 ‘실존적 결단’은 대개 역사가 되지 못한다. 희로애락이 너무나 사소하고 변변찮은 것들이어서 역사와 만나는 ‘웅장함’ 따위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평범한 이들의 ‘비장함’이란 기껏해야 월급통장과 주식시황과 집값시세 정도를 들여다 볼 때라야 가장 빛나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실존적 결단의 바탕은 도덕과 실천이성일텐데, 필부필부의 그것은 ‘밥줄’과 가계금융자산에 묶여 있고, 내가 가진 권한이라야 매일 나서는 아파트 현관 문턱과 한 자리 차지한 회사 책상의 테두리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꾹 참고 있던 ‘입바른 소리’를 한번쯤 내보는 ‘실존적 결단’을 한다 해도, 역사와 만나기 보다는 시정잡배의 드잡이로 휘말려 욕이나 한 사발 먹기 딱 좋다.

소시민의 실존적 결단이란 시인 김수영이 읊은대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자괴감만 쌓을 일이다. 시인이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년)에서 노래한 대로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 고작 “일(一)원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우습지 않으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고 자조하는 시행을 굳이 따라붙였다.

이렇듯 고만고만한 인생의 주인공들과 달리, 역사의 기로에 서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대단한 이들이 있다. 다만 개인의 것일 뿐이었던 삶을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에 던진 이들이 있다. 역사가 되고, 역사로 기록된 ‘실존적 결단’을 한 이들이다. 지금 한창 흥행 중인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과, 앞서 개봉했던 ‘그때 그사람들’(2005년, 감독 임상수) ‘남산의 부장들’(2020년, 감독 우민호) ‘1987’(2017년, 감독 장준환)이 그리는 사람들이다. 이들 작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사건으로부터 12·12 군사쿠데타를 거쳐 신군부의 집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1979년부터 1987년까지의 현대사를 극적으로 재현했다. 모두 실화와 실존인물에 기반해 허구를 섞은 역사 드라마다.

이들 작품은 역사 그 자체가 ‘스포일러’다. 이미 법적인, 교과서적인 평가도 대체로 이루어진 사건을 소재로 했다. 실제로 이들 작품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史實)을 발굴하거나, 우리 사회가 합의한 역사적 평가와 다른 해석을 내놓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지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들의 매력과 가치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에 휘말린 인물들의 재현방식, 그들의 ‘실존적 고뇌와 결단’을 상상적으로 그려낸 방식이 아닐까.

‘영화적 빌런’ 전두광 vs ‘실패한 영웅’ 이태신

‘서울의 봄’이 당대 역사를 직접 경험했던 40~50대 이상은 물론이고, 책으로만 배웠던 20~30대까지 아우르며 대규모 흥행 중이다. 세대 불문하고 관람 후기의 정조는 ‘분노’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화를 내고 억울해 한다. 중장년 관객들은 스스로 지나왔던 시대를 ‘성난 얼굴’로 회고하며, 다시한번 그 참혹함에, 무기력함에 치를 떤다. 청년관객들은 역사 교과서 한 귀퉁이 몇 줄, 몇 장의 활자로 요약됐던 역사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드라마로 각인했을 것이다. 책의 건조한 문장 행간 사이에 녹아 있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비로소 느꼈을 것이다. “몰랐던, 궁금했던 역사를 찾아 보게 됐다”는 젊은 관객들의 평이 이어진다. ‘N차 관람’(반복관람) ‘심박수 챌린지’(영화관람 중 혈압, 심박수 등을 스마트워치나 애플리케이션으로 인증하는 것)도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젊은 관객들에겐 영화 이해의 문턱이 낮지 않다. 아마도 ‘전두광’(황정민 분)의 모델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 외에는 대부분의 실존 인물들이 낯설기 때문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직책과 역할, 서열과 관계도도 복잡하기만 하다.

영화 속 숱한 허들을 상쇄시키는 것은 ‘영화적 빌런’으로 재창조된 쿠데타 주역 ‘전두광’과 ‘실패한 영웅’으로 재탄생한 ‘이태신’(정우성 분)의 간명한 선악대결구도이다. 실제 역사는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많은 범죄행위를 미결로 남겨두었고, 법적인 응징과 처벌도 완료하지 못했다. 영화는 전두광이라는 캐릭터를 사실상 절대악에 가까운 빌런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역사가 밝혀내지 못한 쿠데타 범죄의 세부를 대체한다. 적어도 영화 속에선 쿠데타 세력이 승리해 군사독재가 계속됐던 역사의 처음과 끝이 권력의 화신인 ‘악한’ 전두광에 있는 것이다. 전두광은 곧, ‘정의가 승리하리라’는 역사적 이상의 ‘알리바이’(부재증명)이자, 불의의 편에 가담한 자가 더 잘 사는 ‘권악징선’의 현실에 대한 ‘역설의 근거’인 것이다.

주저없이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전두광과 달리, 이태신은 종종 감상에 빠진다. 영화 속 그의 삶엔 실존적 고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대개의 우리는 전두광의 악마같은 권력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이태신이 빠졌을 실존적 고뇌에는 익숙하다. 나라와 역사의 운명이 걸려있진 않지만 우리의 삶엔 ‘가족을 위해 눈 한번 딱감고 해야할 일’과 ‘모르는 척 못 이기는 척 넘어갈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아내가 챙겨준 목도리를 감고 쿠데타 세력과의 ‘전장’으로 나서는 이태신의 비장함에 관객들은 눈시울을 붉힌 것이 아닌가. 나라의 운명같은 거창한 것은 알 것 없지만, 가족을 배신하는 일만큼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인지는 너무 잘 아는 것이 우리네 보통 인생들이니 말이다.

‘그때 그사람들’ 혹은 ‘남산의 부장들’과 ‘용산의 장군들’

‘서울의 봄’은 관객 1000만명을 향해 가고, 이 작품의 흥행에 힘입어 ‘남산의 부장들’과 ‘1987’도 각종 영상 구독 플랫폼(OTT)에서 ‘역주행’ 중이다. 개봉 당시에도 ‘남산의 부장들’은 475만명, ‘1987’은 723만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서울의 봄’을 포함해 이들 흥행작의 공통점은 서슬퍼런 군사독재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매우 매력적인 ‘영화적 빌런’으로 재현해냈다는 데 있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배역을 맡은 점도 공통적이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이 그렇거니와, ‘남산의 부장들’의 ‘박통’(이성민 분)과 ‘1987’의 ‘박처원’(김윤석 분)도 마찬가지다.

‘전두광’은 피에 굶주려 날뛰는 짐승같이 권력욕에 미친 군인이다. ‘박통’은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서슴지 않는 비열하고 악독한 인간이다. ‘1987’에서 고문과 불법수사를 서슴없이 자행할 뿐 아니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는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인 ‘박처원’은 개인적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힌 ‘빨갱이 사냥꾼’이다. 이들이 순수한 악의 화신으로 재창조된 덕에 반대편에 서서 맞서 싸우는 인물은 관객을 쉽게 심리적, 감정적 동조자로 끌어 들인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통’을 살해하는 ‘김규평’(이병헌 분)은 실존모델인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영화상으로는 일종의 ‘타락한 영웅’ 혹은 ‘일탈한 영웅’이다. ‘독재자의 처단’이라는 그의 행위는 얼핏 ‘더 이상의 국민 희생을 막는다’는 공적인 명분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자의 모멸감과 새로운 1인자를 향한 야망 등 개인적 동기가 더 강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미 군사독재정권의 주역 중 하나로 온갖 범행을 저지른 윤리·도덕적 흠결도 크다. 일종의 ‘안티 히어로’다.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이 윤리·도덕·이상에서 완벽에 가까운 영웅인 것과는 대조된다. 이태신은 운명에 패배한 영웅으로 전통적인 비극의 주인공상을 보여준다.

‘서울의 봄’에선 12·12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자 제 몸 하나 도망치기 바쁜 국방장관(김의성 분)부터 목숨을 걸고 상사와 함께 제자리를 지키는 소령(정해인 분)까지 전두광 일당에 대처하는 장군과 장교들의 행동도 큰 볼거리다. 이들은 모두 쿠데타에 동조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다. 어떤 이들에겐 ‘무엇이 옳으냐’는 신념의 문제고, 어떤 이들에겐 ‘어느 쪽이 더 유리하냐’는 이해의 문제다. 관객들은 역사에 휘말린 다양한 인물들을 보며 “나라면?”이라는 실존적 질문을 안 던질 수 없다.

반면, 한국영화로선 보기 드물게 권력을 정면으로 풍자한 블랙코미디인 ‘그때그사람들’엔 전형적인 영웅도 악한도 없다. 대단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지만 엄숙함이나 비장함과도 거리가 멀다. 매사 우스꽝스럽고 즉흥적이며 어설프다. 개봉 당시 정치적 논란에 배급규모가 줄어들었다는 영화 외적인 이유를 감안해도 작품성에 비해 흥행은 부진했다(108만명). 빌런과 영웅의 부재가 흥행에선 약점이었다.

그리고 ‘1987’ 혹은 거리의 시민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공적인 이상과 사적인 이해, 윤리·도덕적 신념과 개인적인 사정 사이에서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대개는 무엇 하나 대단하달 것 없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일테지만 매순간의 선택은 우리 각자의 삶을, 우리 각자 존재의 양태를 규정한다. 그것이 실존적 결단이다.

영화 ‘서울의 봄’과 ‘남산의 부장들’은 대단한 사람들의 비장한 결단으로서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사건 주역들의 실존적 결단은 성공이든 실패로든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그때 그사람들’의 주인공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되, 다만 ‘보잘 것 없는’ 욕망과 동기가 부각된다.

이렇듯 ‘남산의 부장들’과 ‘용산의 장군들’로 이루어진 ‘그때 그사람들’의 역사를 지나면, 비로소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영화로는 ‘1987’이후의 시간이다. 이 작품은 ‘박처원’을 중심으로 고문과 폭력·은폐의 고리를 형성한 권력집단을 한 편에 둔다. 맞은 편엔 불의에 저항하는 개인들의 연대가 있다. 영등포교도소장(유해진 분)과 조카 이연희(김태리 분)를 비롯한 검사, 기자, 종교인, 시민운동가 등이 그들이다. 시민적 양심으로든, 직업상 윤리로든 각 개인들의 작은 ‘실존적 결단’들이 모여 역사를 바꾸는 과정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리하여 ‘남산의 부장들’에선 ‘김규평’이 내리는 실존적 결단의 다만 한가지 계기였을 뿐인 시민항쟁이 ‘1987’에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마침내 잔고와 주가와 집값에 목매는 소시민들의 ‘실존적 결단’이 모여 역사가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쿠데타와 혁명으로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의회제와 투표로 권력을 결정하는 민주주의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남산의 부장들’과 ‘용산의 장군들’을 거쳐 ‘거리의 시민들’이 남긴 유산 속에서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다가올 선거들을 앞두고 말이다.

2023년 끝자락, 겨울에 본 ‘서울의 봄’.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과연 어느 곳 어느 계절에 살고 있느냐고.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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