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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韓 뮤지컬 ‘투톱’ 조정은·정선아의 상반된 매력[인터뷰]
라이프| 2024-02-02 14:54
‘레미제라블’ 판틴 역 조정은(왼쪽)과 ‘드라큘라’ 미나 역 정선아 [(주)레미제라블코리아, 오디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단 한 번만 봐도 안다. 누가 봐도 정반대의 성향. 한 사람은 고요한 아우라를 가진 극 I(내향)형, 다른 한 사람은 목소리부터 ‘톤 업’이 된 극 E(외향)형. 얼어붙은 날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봄날의 햇살’ 같은 조정은(45)과 ‘여름날의 태양’ 같은 정선아(40)다.

2000대 초반, 지금의 뮤지컬 계를 이끄는 대형 신인들이 등장했다. 조정은은 가장 작은 역부터 한 계단씩 성큼성큼 올랐고, 정선아는 등장과 동시에 대형 작품의 주역(2002년 ‘렌트’ 미미)을 따내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졌지만 때때로 같은 역할로 한 작품에서 만났고, 그러다 저마다의 풍성한 필모그라피를 써내려갔다. 어느덧 20여년. 배우 조정은·정선아의 시간에 한국 뮤지컬계의 성장과 성취가 담겼다. 두 사람을 각각 따로 만나 이들의 현재와 지나온 시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배우 조정은 뮤지컬 ‘레미제라블’ 한국 공연의 초연부터 세 번째 시즌까지 판틴을 도맡고 있다. 그는 “판틴을 연기할 수 있는 나이대에 ‘레미제라블’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했다. [(주)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20년 경력’ 조정은, ‘레미제라블’ 오디션 다시 본 사연은?

‘한때는 꿈을 믿었지, 희망이 가득했던 시절, 사랑이 영원하도록, 하늘도 축복할 거라고…그 꿈은 어디로 갔나, 다신 찾지 못할 내 꿈’ (‘레미제라블’ 중 판틴이 부르는 ‘아이 드림드 어 드림’ 중)

그 여자는 버려졌다. 사랑도 꿈도 떠나갔다. 구더기처럼 들끓는 치욕과 모멸을 견뎌내는 삶. 지옥 같은 현실에서 사라진 꿈을 잡으려는 판틴은 슬프고 애처롭지만, 강인하다. 끝끝내 삶을 놓지 않는 것은 지켜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시궁창에서 올려다본 별은 딸 코제트였다.

짧지만 강렬하다. 장장 3시간에 달하는 공연에서 출연 분량은 고작 15~20분. 조정은은 단 세 번 밖에 올라오지 않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국어 공연에서 매번 판틴을 도맡는 배우다. 2013년 초연, 2015년 재연, 지난해 11월부터 이어지고 있는 세 번째 시즌(3월 15일까지, 블루스퀘어)까지.

그는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판틴을 연기할 수 있는 나이대에 ‘레미제라블’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이라며 “다음에 또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약속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하루하루 즐겁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미제라블’의 오디션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그 과정을 떠올리며 조정은은 “체에 거르듯 꼼꼼하게 본다”고 말했다. 11년 전 초연 당시 그의 판틴은 찬사 일색이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판틴의 옷을 입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최고의 캐스팅’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 번째 시즌에 접어든 오디션에서 이 작품을 진두지휘하는 세계적인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는 그에게 “너무 익숙해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참 신선했고, 굉장히 동의가 됐어요. 오랜 기간 작품을 해온 데다, 많은 것을 경험하다 보니 너무도 잘 알게 된거죠. 그 나이에만 보여줄 수 있는 감성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익숙해보이지 않기 위해 다시 오디션을 봤어요.”

배우 조정은 뮤지컬 ‘레미제라블’ 한국 공연의 초연부터 세 번째 시즌까지 판틴을 도맡고 있다. 그는 “판틴을 연기할 수 있는 나이대에 ‘레미제라블’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했다. [(주)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닳도록 들여다보고 연구하며, 10여년의 시간 동안 체화한 ‘레미제라블’ 안에서 그만의 새로움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는 “짧은 분량 안에 감정의 폭과 삶의 기승전결,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심정을 담으려 했다”며 “내 안에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며 난리를 치다 보니, 어느덧 그 길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조정은은 2001년 서울예술단의 앙상블로 데뷔, 올해로 24년차가 됐다. ‘미녀와 야수’의 벨,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 ‘드라큘라’의 미나, ‘엘리자벳’의 엘리자벳, ‘베토벤’의 안토니. 무대 위 조정은은 단정하고 온화하다. 그의 별명은 ‘선녀’다. 2010년 출연한 뮤지컬 ‘피맛골 연가’에서 입은 선녀 의상이 ‘찰떡’이라 붙은 별칭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단아한 매무새에 품고 있는 ‘고요한 강인함’은 조정은을 ‘신뢰하는 배우’로 만든다.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선 나무 같아 그의 무대는 언제나 안심이 된다. 정작 그는 “내가 배우가 맞나 싶을 만큼 장점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늘 제 노래가 못마땅했어요. 고음이 엄청나게 올라가지도, 성량이 크지도 않아요. 커튼콜에 나가 이렇게 박수를 받아도 되나 싶은 마음도 들었어요. 그러다 나만의 고유성에 대해 인정하게 됐어요.”

멜로디 하나, 가사 한 줄에 드라마를 실어내는 조정은의 연기는 섬세하다. 과장 없이 편안한 자연스러움으로 무대를 만든다.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나 자신을 늘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선을 넘지 않으려 하고 있다”며 “눈앞에 있는 것부터 잘 하는 데에 급급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며 조용히 웃는다.

‘레미제라블’은 관객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조정은은 이에 대해 “누구나 한 번은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지만, 스스로 던지기 싫은 질문”이라고 했다. 조정은이 찾은 답은 바로 그가 배우로서 가는 방향성이었다.

“‘당신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나요.’ 인생에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 묻는 이야기에요. 전,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것, 욕구가 아닌 나의 비전에 맞게 살아가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어요.”

정선아가 2014년 초연 이후 10년 만에 뮤지컬 ‘드라큘라’ 미나 역으로 돌아왔다. 그는 “10년 전엔 날 것의 미나였다면, 지금은 내공이 쌓인 미나”라고 했다. [오디컴퍼니, 팜트리아일렌드 제공]
10년 만에 다시 ‘드라큘라’ 미나로…정선아 “성숙한 미나 기대해달라”

펑펑 울었다. 복귀 전에도, 복귀 후에도, 복귀에 대한 찬사를 받은 후에도. 심지어 인터뷰 중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시간의 무게가 차곡차곡 쌓여 정선아는 또 한 발 나아갔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결혼과 임신, 축복 같은 아이를 품에 안았지만, 다시 무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체중은 80㎏까지 늘었고, 무대 위에서 과연 노래를 하고 춤을 출 수 있을지 불안감이 커졌다. “‘정선아, 옛날같지 않네’, ‘아이 낳고 오더니 이젠 안되겠네’. 그런 이야기를 들을까봐, 그러면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아 두려웠다”고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아도,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면 얼마든지 전보다 좋은 기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러닝머신을 미치도록 뛰었고 연두부와 달걀, 낫토로 버티며 살을 뺐다. 임신 중에도 보컬 레슨을 받았다. 그 때도 많이 울었다. 지난해 개막했던 복귀작 ‘이프덴’은 정선아의 인생 2막을 알린 작품이었다. 지난달 15일 열린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의 성취를 가져다줬다.

정선아는 “신체의 변화도 있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이 맞나 고민이 많았다”며 “그런데 일과 결혼의 갈림길에 놓인 주인공의 삶이 나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여우주연상을 받는 무대에서도 정선아는 울었다. 눈물이 범벅이 된 그에게서 지난 시간 동안의 불안과 무게가 쏟아져 나왔다.

지난 20년 정선아는 뮤지컬 무대 위에서 가장 화려한 캐릭터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독특한 주인공들을 도맡았다. ‘냉미녀’ 스타일이면서도 허당미(美)까지 촘촘(‘위키드’ 글린다, ‘아이다’ 암네리스)했고, 천방지축이면서도 강인(‘모차르트’ 콘스탄체)했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어도 강력한 존재감을 남겼다. 독보적인 캐릭터에 인공지능처럼 정확하고 시원시원한 가창력은 열광을 끌어낼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어둠을 잡아먹는 한여름 태양처럼 뜨겁고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정선아가 2014년 초연 이후 10년 만에 뮤지컬 ‘드라큘라’ 미나 역으로 돌아왔다. 그는 “10년 전엔 날 것의 미나였다면, 지금은 내공이 쌓인 미나”라고 했다. [오디컴퍼니, 팜트리아일렌드 제공]

10년 만에 다시 출연한 ‘드라큘라’(3월 3일까지, 샤롯데시어터)에선 정선아의 지나온 시간과 현재를 만날 수 있다. 초연 당시 조정은과 더블 캐스팅으로 미나 역을 연기한 이후 처음이다.

그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이 작품을 전보다 잘할 수 있을지, 10년간 이토록 큰 사랑을 받은 작품에 누를 끼치진 않을지 너무나 큰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지나온 시간은 경험치로 쌓여,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정선아가 연기하는 미나는 드라큘라 백작이 이어온 ‘천년의 사랑’의 주인공.

”10년 전엔 약혼자를 버리고 가는 미나의 사랑과 감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이젠 나이의 깊이도 생겼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아요. 10년 전엔 날 것의 미나였다면, 지금은 내공이 쌓인 미나예요.”

사실 정선아는 실패가 없었던 배우다. 늘 주역이었고, 무대 위에선 언제나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20대 후반께, 10년차 정도 됐을 때 찾아온 매너리즘은 그를 대차게 흔들었다.

“덜컥 꿈 같은 무대에 오르며 정신없이 지냈는데 어느 순간 정선아로 사는 건지 캐릭터로 사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제 삶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노래를 해야 하니 술을 마시면 안됐고, 고성방가를 할 수도 없고, 친구들도 못 만나 갈증이 있었나봐요. 자신감만 있고, 자존감은 높은데 감사함이 없던 시절이었어요.(웃음)”

그가 선 곳에 도달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나가는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자기 안에 빠진 날들이었다. ‘이유 없는 우울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장애인 시설 봉사활동 때문이었다. 정선아는 “가진 돈이 엄청 많으면 기부를 하겠지만, 가진 게 몸과 노래라 한 번씩 찾아가 노래도 하고 같이 노는 정도”라며 웃었다.

23년차 배우가 된 정선아의 ‘2막’엔 여유가 더 쌓였다. 그는 “이전엔 무대에서 잔뜩 힘을 들여 악바리처럼 했다면 지금은 힘을 빼는데도 노래와 연기가 더 잘 된다”고 말했다. 롤모델은 35년차 뮤지컬 배우 최정원이다. “겸손하고 사랑이 많고 엄청난 에너지의 선배”를 닮고 싶다.

“처음엔 막연히 최정원 선배의 노래가 좋았는데, 어느 순간, 그 자리에 굳건히 있는 모습이 너무 대단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렇게 멋지게 자리하는 선배가 있어 제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후배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무대에서 반짝반짝한 선배로 있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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