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5 응급실 종합상황판 가용 병상 줄어 ‘빨간불’
‘응급실 이용 어렵다’ 입간판 세우거나 안내도
구급차 업체 “응급실 대기 길고 환자 돌려보내”
전공의 대신 교수, 전임의 일하지만 한계 전망
이른바 ‘빅5’ 병원의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병원 현장을 떠나면서 ‘의료대란’이 현실로 나타난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실이 환자와 의료진이 대화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
[헤럴드경제=김용재·박지영·안효정 기자] “전공의 파업으로 응급실에 진료를 볼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대기도 길어질 수 있다는데 언제 진료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대요.”
21일 새벽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과 정신이 혼미해져 119 구급대를 부른 20대 A씨는 119 구조대원으로부터 ‘응급실 진료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주로 응급실 당직을 서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으로 응급실이 응급환자를 보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전공의 공백은 응급 진료를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됐다.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 가능성이 대두됐던 초기, 응급의학과에서 우려했던 ‘응급실 뺑뺑이’가 현실화 되는 분위기다.
21일 헤럴드경제가 중앙응급의료센터의 응급의료포털(E-GEN) 종합상황판을 통해 확인한 결과, 오전 9시 기준 이른바 ‘빅5’ 병원(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 일반 응급실 종합상황판에 ‘빨간불’이 뜬 병원은 4곳(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이었다. ‘빨간불’의 의미는 일반 응급실에 가용할 수 있는 병상이 50% 미만이라는 뜻이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응급실이 응급상황을 맞았다. 사진은 21일 오전 신촌세브란스병원 응급실 전경. 안효정 기자 |
서울대병원의 경우 일반 응급실 병상 26개를 모두 가용하고도 5개의 병상이 모자란 상태였고, 신촌 세브란스병원은 20개 병상 중 6개만 사용 가능했다. 서울 성모병원은 27개 병상 중 9개를, 삼성서울병원은 59개 병상 중 23개만 사용이 가능했다. 문제는 사용 가능한 병상은 있지만 의사가 없을 경우 응급실은 응급 환자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신동민 한국교통대학교 응급구조학과 교수는 “치료할 수 있는 의사 수는 적고 환자는 몰리다 보니 종합상황판에 빨간 불이 떴다고 볼 수 있다”며 “응급실에 상당한 문제가 있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고 평했다.
‘빅5’ 병원 중 응급실 이용이 어렵다는 입간판을 써붙인 곳도 있다. 전날 오전 서울시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응급실 앞에는 “현재 응급실 병상이 포화 상태로 진료가 불가하다”며 “신속한 진료를 위해 인근 병원 응급실을 이용해 달라”는 입간판이 붙었다. 지난 19일 오전에는 신촌세브란스병원이 응급실 접수를 중단하기도 했다.
20일 정부와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등 '빅5' 병원의 전공의들이 오전 6시를 기해 근무를 중단했다. 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 앞 모습. [연합] |
전공의들의 집단사직으로 ‘의료대란이 심각하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사설 구급차 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어제 전공의 집단 사직을 기점으로 의사가 없다고 환자를 안 받는 응급실이 있었다”며 “응급실에 가면 (응급실내) 환자는 없는데 의사도 없으니 대기를 했다가 들어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다른 사설 구급차 업체 대표 B씨는 “응급실에 환자를 보내기 위한 대기도 길어졌고, 상급종합병원에서 다른 병원에 가라며 환자를 내려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날 새벽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는 “중증 질환자라 이 병원 응급실을 자주 찾는 편이다. 지난밤에는 북적대던 평소와 달리 환자를 많이 받지 않아 한산했다”며 “반면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은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전날 고관절 골정상을 입은 80대 임 모 씨는 대학병원 3곳에서 수술을 거부당해 국군수도병원에서 수술받기도 했다.
수도권 내 종합병원 중에서는 전공의가 부족해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알린 병원도 속속 확인됐다. 서울시 강동구 강동성심병원은 전문의 집단 사직이 시작된 지난 20일 산부인과, 피부과, 정신건강의학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진료가 부족하다는 알림을 내보냈다.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서울시 강남구 연세대학교 강남 세브란스 병원은 이날 새벽 1시 ‘성형외과 의료진 부족으로 얼굴 열상 등 성형외과 진료가 불가하다’는 알림을 올렸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가시화하면서 정부가 군 병원 12곳의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후 경북 포항에 있는 해군포항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민간인 환자가 올 것에 대비해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 |
지방 상황은 이보다 심각하다. 대구 영남대학교병원과 카톨릭대학교병원 응급실은 산부인과, 신경과, 소아과, 성형외과 등 다수의 진료과목 관련 환자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영남대병원의 경우 중환자만 확인 후 겨우 진료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해졌다.
대형병원에서는 급한 대로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교수와 전임의(펠로) 등으로 메우고 있지만 2~3주 내로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전임의들마저 사직 릴레이 동참 의사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날 ‘빅5’ 병원을 포함한 전국 82개 수련병원 소속 임상강사·전임의들은 입장문을 내고 “현재의 상황에서는 의업을 이어갈 수 없다”며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고수할 경우 전공의들을 따라 현장을 이탈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날 응급실 당직을 섰다는 한 간호사는 “교수와 펠로가 응급실 당직을 병행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업무에 차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도 사직서를 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빅5 소속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헤럴드경제와의 통화에서 “전공의들이 현장을 이탈하면서 응급실 당직근무를 들어가고 있다”며 “주변에는 휴가를 취소하고 병원에 복귀한 교수도 있다, 오랜만에 과거 레지던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했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가시화하며 정부가 군병원 12곳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후 의료진들이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에서 민간인 환자를 옮기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정부는 비상진료대책을 세우며 의료공백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 정부는 전국 12개 군병원 응급실을 개방하고,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며 현장 복귀를 촉구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복지부는 주요 수련병원 100곳 중 50곳에 직원을 파견해 현장을 점검하고, 업무개시명령에도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에 대해서는 ‘면허 정지’ 등 행정 처분을 내린다는 방침이다.
다만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국 수련병원 대표 100여명은 전날 5시간가량 긴급 임시대의원총회 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전공의들은 성명서를 통해 “잘못된 정책을 철회하고 비민주적인 탄압을 중단하라”며 “정부는 정치적 표심을 위해 급진적인 의대 증원 정책을 발표했다. 의사 수를 늘린다고 한들 저수가와 의료 소송 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의료 공백과 관련해서는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니 대한민국 의료가 마비된다고 한다”라며 “피교육자인 전공의가 없다는 이유로 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작금의 병원 구조가 바람직한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의료대란 장기화 조짐을 두고 김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응급실까지 버리고 전공의들이 파업을 선택한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라면서도 “응급실이 버틸 수 있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대학병원의 경우 외래와 경증환자 진료를 줄이고 응급 중환자 진료에 집중해야 한다”라며 “PA간호사를 적극 활용하도록 시행규칙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brunch@heraldcorp.comg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