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독립운동하는 비올레타, 모던보이 알프레도…경성 시대 입은 베르디 오페라
라이프| 2024-04-17 13:10
서울시오페라단 ‘라 라트비아타-춘희’ 간담회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10년~1930년대 어느 사이, 일제 강점기. 기생으로 ‘위장 취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비올레타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대부 양반가 자제인 ‘모던 보이’ 알프레도는 시대의 비극가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 절망의 시간을 보낸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경성 시대’를 입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올해 첫 작품인 ‘라 라트비아타-춘희’(4월 25~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는 1948년 ‘춘희:동백아가씨’라는 제목으로 선보인 국내 최초의 오페라다. 원작은 185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에서 지금도 무수히 많이 올려지는 작품이다.

희대의 스테디셀러가 한국을 찾아오자, 오페라는 완전히 우리의 이야기가 됐다. 연출을 맡은 이래이 연출은 지난 1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멀리 있는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주위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 트라비아타’는 1800년대 프랑스 파리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폐병을 앓는 파리 사교계 여왕이자 코르티잔(과거 유럽에 존재했던 귀족 및 왕족, 부자 같은 상류층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이자 이들의 정부)인 비올레타와 귀족 알프레도,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격차로 두 사람의 사랑을 반대하는 아버지 제르몽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경성 시대’를 만나 인물의 색이 달라졌다.

박혜진 서울시오페라단장은 시즌 첫 작품으로 구상한 ‘라 트라비아타-춘희’에 대해 “드라마 ‘미스터선샤인’(tvN)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드라마처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라 트라비아타’ 악보를 보니 스토리가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한복만 입은 인물들로 만든 적이 있는데, 이번 공연은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작품이다”며 “양장과 한복의 만남, 서양식 가옥과 전통가옥의 만남, 혼동과 열망이 만나는 경성 등 많은 만남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오페라단 ‘라 라트비아타-춘희’ 간담회 [세종문화회관 제공]

실제로 ‘라 트라비아타’의 설정은 경성 시대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특히나 캐릭터 설정이 달라지며 원작에선 가련한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던 비올레타가 강인하고 주체적인 인물이 됐다는 점에서 동시대 감수성을 입었다. 프랑스 희곡 전문가로 꼽히는 조만수 충북대 교수가 드라마투르그(문학·예술적 조언을 하는 전문가)로 참여했다.

이 연출가는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가 이탈리아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진 작품으로 이를 한국적인 상황에 대입한다면 한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경성이라는 배경 자체가 ‘라 트라비아타’가 작곡됐던 시대처럼 격동의 시기여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제시대라는 배경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며 “비올레타는 독립운동하다 알프레도를 만나 사랑을 경험하면서 개인이 가진 자유에 대한 가치 등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다.

달라진 인물 설정을 소화하는 만큼 성악가들의 캐릭터 해석은 설득력 있는 작품을 만들 중요한 변수가 된다. 비올레타 역을 맡은 소프라노 이혜정은 달라진 배경 속 비올레타에 대해 “더 강인한 캐릭터”라며 “독립군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알프레도와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다가가 유혹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같은 역에 더블 캐스팅된 이지혜는 “알프레도를 사랑하는 감정선은 다르지 않다”며 “다만 비올레타가 죽기 전을 보면 원래는 여자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놔주고 죽는 걸 슬퍼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도 쟁취하지 못하고 독립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인생을 억울해하는 부분이 있다”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서울시오페라단 ‘라 라트비아타-춘희’ 간담회에 참석한 바리톤 김기훈 [세종문화회관 제공]

비올레타와 사랑에 빠지는 알프레도 역은 테너 정호윤와 손지훈, 제르몽 역은 바리톤 유동직과 김기훈이 맡는다.

시대와 캐릭터에 변화를 줬지만, 오페라는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포함하진 않는다. 대사나 노래 등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은 원작과 동일하다.

이 연출은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거기에서 부딪치는 개인의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 가사와 가사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를 덧붙였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오페라 특성상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을 가미한 허구의 공간과 시간으로 이해하면 좋겠다”고 했다.

지휘는 대전시향 상임지휘자인 여자경이 맡았다. 그는 “스토리는 달라져도 음악은 변화없이 원작 그대로 풀어간다”며 “왈츠의 3박보다 조금 다운된 느린 미뉴에트가 작품 곳곳에 숨어있다. 비올레타에게 찾아온 사랑, 비올레타와 알프레도가 재회하며 부르는 화해와 용서의 이중창 등 오페라 곳곳에 숨은 춤의 호흡을 끌어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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