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초동판매량 소진’ 위해 사인회만 90번...기형적 K-팝의 민낯
라이프| 2024-04-29 11:10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컨퍼런스센터에서 어도어 경영권 탈취 의혹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우리 멤버들 기죽을까봐 (팬사인회)갔던 애들이 가고 또 가고, 앨범을 사고 또 사고, 도대체 이게 뭐야. 저는 지금 음반 시장이 다 잘못됐다고 생각해요.”(민희진 어도어 대표)

앨범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각종 꼼수·트렌드만 좇는 공장식 앨범 제작 등 기형적인 K-팝 시스템의 치부가 만천하에 폭로됐다. 20여 년간 업계에 몸 담은 K-팝 리더의 입을 통해서다.

민 대표는 25일 135분간 이어진 이른바 ‘격정의 기자회견’을 통해 K-팝업계의 병폐를 낱낱이 꼬집었다.

그는 “지금 업계는 하나 하나 바뀌어야 한다. 랜덤 포토카드, 밀어내기 이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민 대표가 언급한 포토카드와 밀어내기는 현재의 업계에서 앨범 발매량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수단이다.

‘랜덤 포토카드’는 한 그룹에 속한 다수 멤버들의 사진을 랜덤으로 앨범에 넣어 음반을 판매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결과, 한 명의 팬이 많게는 수십 장의 앨범을 구매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해졌고, 포토카드만 간직하고 음반은 버리는 ‘앨범깡’ 폐해가 극심해져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 K-팝 팬덤 사이에선 이로 인한 환경 문제도 일찌감치 지적됐다.

한 대형 유통사 관계자는 “한국 팬덤은 물론 중국 팬이 한국에 와서 엄청나게 많은 수량의 음반을 산 뒤 포토카드만 빼고 음반은 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아 호텔 측에서 음반을 수거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밀어내기도 심각하다. ‘밀어내기’는 유통·판매사가 그룹의 신작 앨범의 초동(음반 발매 후 일주일 동안의 판매량) 물량을 대규모로 구매한 뒤 기획사가 팬사인회 등으로 보상해주는 관행을 말한다. 이는 K-팝업계의 성공 지표로 자리한 초동 판매량을 높이기 위한 방식으로 업계에 암암리에 자리잡았다.

‘초동’에 대한 집착은 팬덤 사이에서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소위 “저 그룹보다는 우리 그룹 성적이 더 잘나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작보다는 초동이 높아야 한다”는 생각에 초동 기록을 높이기 위해 음반을 사고 또 산다. 기획사가 불을 지핀 판매 전략을 팬덤이 적극적으로 수용, K-팝업계의 악순환의 고리가 된 상황이다.

민 대표는 “밀어내기는 알음알음 다 하고 있다”며 “밀어내기를 하다 보면 무엇 때문에 수치가 올라가는지 몰라 시장이 비정상이 되고, 계속 우상승하다 보니 나중엔 주식 시장도 비정상이 된다”고 말한다. 뒷사정과는 무관하게 초동 수치는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밀어내기의 부담은 팬들에게 전가된다. 팔지 못한 초동 물량을 ‘럭키 드로우’로 소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팬사인회를 열어야 하다 보니 연예인도 너무 힘들어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밀어내기’ 전략이 많이 쓰이다 보니 실제 신인 그룹의 팬사인회 일정이 엄청나게 늘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가요계 관계자는 “이 방식이 잘 먹힐 때도 있었는데 지난해부터 고물가의 여파로 밀어내기가 통하지 않자, 초동 물량 소진을 위한 팬사인회 등의 럭키 드로우 행사가 상당히 많았다”고 했다.

이어 “한 유명 신인 보이그룹의 경우 4개월간 75회의 팬사인회에서 럭키 드로우를 돌렸다. 한 해 동안 팬사인회만 92번 연 걸그룹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 부담을 팬들이 떠안게 되고 시장을 교란하게 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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