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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정복’ 꿈 꿨던 페퍼톤스 “우리 음악과 함께 나이 들고 있다” [인터뷰]
라이프| 2024-04-29 16:52
페퍼톤스 [안테나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99년, 열여덟 살 두 소년은 그 해 처음 만났다. 카이스트 전산학과 강의실에서였다.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눈에 알아봤다. 조금 빨리 대학생이 된 이들은 ‘세계’도 작았는지, ‘우주 정복’을 꿈꾸며 음악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허황된 꿈을 가지고 시작한 밴드”(이장원)라며 웃지만,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10대에 만나 20대 청춘을 함께 해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울증을 위한 뉴테라피 2인조 밴드’로 음악계에 ‘후추처럼 기분 좋은 자극을 주겠다’며 등장한 페퍼톤스다.

2003년 스물네 살에 밴드를 결성, 이듬해 데뷔 앨범 ‘어 프리뷰’를 낸지 어느덧 20년이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페퍼톤스 신재평(43)은 “하루하루 쌓인 날들이 20년이라니 겸연쩍은 마음도 있지만, 자랑스럽다. (이) 장원이가 착해 20년을 할 수 있었다”며 진심 섞인 이야기를 농담처럼 건넸다. 옆에 있던 이장원은 “더이상 우정 마케팅을 안 하려 했는데 정말 복인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뜬구름 잡듯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환갑 때까지 노래 부르는게 꿈이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는데 40대 중반에도 둘이 나란히 앉아 음악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점도 있어요.” (신재평)

지난 20년 페퍼톤스는 조금씩 변화하며 진화의 길을 걸었다. ‘우울증 극복’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은 첫 정규앨범이었던 ‘컬러풀 익스프레스’(2005)였다. 페퍼톤스를 잘 몰라도, 이들의 음악은 두 사람의 개성과 지향점이 진하게 묻어난다. 밝고 긍정적인 감성, 귀에 콕 박히지만 전자회로를 마주하듯 단순함은 찾아볼 수 없는 멜로디 라인이 특징이다. 이 앨범의 ‘수퍼 판타스틱’은 2007년 최우수댄스& 일렉트로닉 노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페퍼톤스 [안테나 제공]

이장원은 데뷔 초창기를 돌아보며 “우리 두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페퍼톤스를 만들고 싶었다”며 “100% 생계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한 밴드였고, 기쁨을 유지하는 밴드로 활동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2008년 2집 ‘뉴 스탠더드’를 통해 실험적 사운드를 들려주며 이른바 ‘페퍼톤스 사운드’를 정립한 밴드는 그 해 12월 안테나 뮤직으로 옮기며 현재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데뷔 20주년을 맞은 페퍼톤스는 대대적인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지난 17일엔 20주년 기념 앨범 ‘트웬티 플렌티’를 냈다. 두 장의 CD로 이뤄진 앨범은 뉴트로(뉴+레트로의 합성어) 감각을 더했다. 카세트테이프처럼 A 사이드(Side) ‘서프라이즈(SURPRISE)!!’와 B 사이드 ‘〈〈리와인드(REWIND)’로 구성했다. 페퍼톤스의 대표곡들을 동료, 후배 뮤지션들이 다시 불렀다. 나상현씨밴드는 ‘뉴 히피 제너레이션’, 루시는 ‘레디, 겟 셋, 고!’, 이진아와 정동환은 ‘공원여행’, 스텔라장은 ‘청춘’을 그들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두 사람은 지금의 페퍼톤스를 있게 곡으로 ‘행운을 빌어요’(2012년 ‘비기너스 럭(Beginner’s luck)‘)를 꼽았다. 이 곡은 잔나비가 리메이크했다. 신재평은 이 노래는 “우리에겐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와 같은 노래”라며 “이별 노래인데 제목 때문인지 수능 날마다 나온다”며 웃었다. 그의 이야기에 이장원은 “역시 중요한 건 액면가”라고 말을 보탰다. 25년 우정의 티키타카다.

“A 사이드에 있는 곡들은 공연을 할 때 빠지지 않는 곡이에요. 이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그때 반짝하고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해도 낙관적인 이야기,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에 사람들이 계속 들어주는구나 싶어요.” (신재평)

‘낙관적인 세계관’은 대중이 생각하는 페퍼톤스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신재평은 “어떤 때는 슬픈 음악, 차분한 음악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고 공감을 하지만, 페퍼톤스는 신나고 활기차고 명랑한 음악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밝은 분위기 덕분에 페퍼톤스의 음악은 TV 예능 프로그램, 홈쇼핑, 드라마의 단골 BGM(백그라운드뮤직)으로 자리잡았다. 이장원은 “BGM을 생각하고 만든 노래는 아니었지만, ‘당신 인생의 BGM이 돼줄 음악, 인생의 양념이 돼줄 BGM 같은 음악’은 노래를 만들 때의 ‘캐치 프레이즈’ 중 하나였다”며 “멋 부리려고 한 이야기가 말하는 대로 됐구나 싶다”며 웃었다.

페퍼톤스 [안테나 제공]

20주년 기념 음반에선 페퍼톤스의 ‘버킷리스트’도 이뤘다. 신재평은 “라디오헤드와 비틀스의 모음집을 재밌게 들어 우리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며 “당시 다른 곡들과 경쟁해서 아깝게 앨범에 실리지 못했던 곡들의 패자부활전 같은 느낌을 B 사이드로 버무렸다”고 말했다.

B사이드에 수록된 ‘코치’는 어린이 탁구 왕중왕전을 시청하던 중 마주했던 코치의 얼굴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다. 이장원은 “유망주에서 나이가 들며 퇴물처럼 보이지만, 두 번째 기회를 얻으면서 사라진 열정을 재확인하는 순간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했다. 타이틀곡인 ‘라이더스’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곡이다. 두 사람은 “어른이 돼간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을 하거나, 녹록치 않은 세상에서 어릴적 가졌던 꿈을 내려놓고 타협하면서도 그 안에서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그게 우리가 살아나가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타이틀곡 ‘라이더스’는 두 사람과 동행해온 팬들을 향한 감사와 응원의 메시지를 담았다.

20대 초반에 데뷔해 20년을 보냈지만, 페퍼톤스는 여전히 청춘이다. 4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20대 초반의 순수함과 반짝거림이 묻어난다. 이장원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두 사람이 만났기에 어느 정도 (순수함이) 보존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우리는 우리의 음악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 작품은 자신이 어떤 시기를 살아가고 있든지 그 때마다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저희는 지금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어요. ‘청춘’을 브랜딩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20대는 물론 40대 중반이 된 저희와 비슷한 또래의 동년배들이 들었을 때에도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으면 좋겠어요.” (신재평)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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