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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 재야거목들의 사랑방…“백기완을 기억하는 6800명이 함께 만든 터전이죠” [민중의 삶 품은 ‘백기완 마당집’]
뉴스종합| 2024-05-24 18:04
2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백기완 마당집’의 정원과 입구 전경. 왼쪽의 살구나무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생전 벗이었던 신학철 화백(현 재단 이사장)으로부터 묘목을 선물 받아 기른 것이다. 창문에는 백 소장의 미공개 시 ‘헌 신문을 읽다가’와 이종구 화백의 작품 ‘별이 된 백기완’이 나란히 전시됐다.

[헤럴드경제=김진 기자]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3분,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 사이 ‘백기완 마당집’은 숨어 있다. 유행하는 감성 맛집으로 소개될 법한 카페와 식당들 틈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주택은 오히려 시선을 잡아 끈다. 고(故) 백기완(1933~2021)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생전 붓글씨 모양을 본뜬 간판과 오래된 철제 대문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마당집의 뿌리를 알 수 있다. 1967년 백범 김구 선생의 이름을 딴 백범사상연구소를 출범,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이끈 그가 30년 넘게 저서를 집필하던 사무실이자 격동기 재야 인사들의 사랑방이다. 문패엔 오랜 벗인 문정현 신부가 서각한 ‘해방세상’ 네 글자가 이름 대신 새겨졌다. 이 집의 발자취를 소개하는 글은 이를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던 보금자리”라고 했다.

백 소장이 세상을 떠난 지 약 3년 만인 올해 노동자의 날(1일) 문을 연 마당집은 생전 백 소장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백 소장이 1980년대 대학가 강연비와 민중모금운동이었던 ‘통일마당집 한 돌 쌓기 운동’을 통해 모은 자금, 김구 선생에게 받은 붓글씨 2점 등을 팔아 마련한 그의 사무실이 돌담벽을 허물고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채원희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은 “한 돌 쌓기 운동은 당시 500원이었던 벽돌 한 장, 담배 한 가치 아껴서 터전을 만들자는 데서 출발했다”며 “이번에도 선생님을 기억하는 분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개관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 돌 쌓기 운동과 마당집 개관에 도움을 준 시민 6800여명의 이름은 건물 외벽에 내걸린 대형 동판에 새겨졌다.

신학철(왼쪽부터) 백기완 노나메기 재단 이사장, 최갑수 재단공동후원회장, 채원희 사무처장, 양기환 전 기획위원장이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백기완 마당집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이 곳에선 마당의 살구나무 한 그루마저 백 소장에 대한 일화를 풀어낸다. 백 소장에게 살구꽃은 자연의 빛깔을 담은 ‘민중의 꽃’이었고, 현재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신학철 화백이 선물한 작은 묘목을 정성 들여 키워냈다. 손수 키운 나무에서 꽃이 핀 어느 날엔 신경림 시인이 지은 ‘월악산의 살구꽃’을 담벼락 벽시에 새기고 읊었다고 한다. 살구나무 그늘이 드리운 건물 외벽 창문에서는 백 소장의 미공개시 ‘헌 신문을 보다가’를 볼 수 있다. “별빛에게 물어본다 / 힘이 있다고 사람을 짐승처럼 죽이고 찍어 누르고 / 뺏어대도 되는 건가.” 옆에 놓인 시 구절을 닮은 초상화 ‘별이 된 백기완’은 노무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이종구 화백의 작품이다.

백 소장의 장편 시 ‘묏비나리’ 구절 일부를 가사로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는 실내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전시가 시작된다. 우선 백 소장의 생애를 ▷통일꾼 ▷예술꾼 ▷이야기꾼 ▷노동해방꾼 테마로 분류해 소개하는 글과 관련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한글사랑운동을 펼칠 정도로 우리 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백 소장이 특별히 아꼈던 단어 24개를 소개한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새내기(신입생), 모꼬지(수련회)뿐 아니라 아주마루(영원), 잘잘(빠이빠이·bye bye), 어림빨(상상력), 한살매(한평생),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공식 구호로 쓰인 아리아리(없는 길을 찾거나 길을 낸다·파이팅 대체어), 백 소장을 소개할 때 등장하는 불쌈꾼(혁명가) 등 주옥 같은 우리 말을 만날 수 있다. 묏비나리의 친필 원고, 강연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보낸 편지 등도 전시됐다.

상설 전시가 이뤄지는 1층 왼쪽 방은 백 소장이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났던 작업실을 재현한 ‘옛살라비(고향) 전시관’이다. 백 소장의 저서 50여권과 아끼던 책, 벗들이 선물해 준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6월 항쟁 때 입은 흰색 무명 저고리, 1974년 긴급조치 1호로 군사재판을 받았을 때 입었던 겨울용 수의도 내걸렸다. 책상 뒤편에 걸린 그림 ‘가위질하는 엿장수’는 신 이사장의 작품이자, 백 소장이 마지막까지 팔기를 거부한 애장품이다.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무언가를 외치는 엿장수를 그린 그림에서 백 소장은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린 뒤 생계를 위해 거리를 전전하는 공장 해고노동자’를 봤다. 신 이사장은 “선생님은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을 해석하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회상했다.

백기완 마당집 1층에 마련된 옛살라비 전시관에 백 소장의 저서 50여권이 놓여져 있다. 옛살라비 전시관에는 백 소장의 저서 외에 생전 입었던 옷과 아끼던 책, 벗들로부터 선물 받은 그림 등이 전시됐다.

2층에서는 개관특별전 ‘비정규직 노동자 백기완’ 전시가 이뤄진다. 백 소장이 마지막 20년을 함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문제해결을 바라서다. 2011년 2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영도조선소 내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백 소장이 희망버스를 타고 찾아간 사진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백 소장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적은 글귀도 ‘노동해방’ 네 글자와 ‘김미숙(김용균씨) 어머니·김진숙 힘내라’였다. 김 전 위원은 해고 37년 만인 2022년 2월 명예복직 및 퇴직에 합의하며 해고노동자에서 벗어났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전시의 ‘알기(중심을 뜻하는 우리 말)’는 계단 위에 새겨진 연보다. 해방 전인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축구선수를 꿈꿨던 백 소장이 2021년 눈을 감기까지 여정과 맞닿은 근현대사의 파고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백 소장이 펼친 각종 민중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치다. 채 사무처장은 “선생님의 한살매가 근현대사”라며 “선생님은 민중의 시선으로 세상을 봤기 때문에, 연보에 민중운동사를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민중운동사는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전 서강대 교수가 정리했다.

2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백기완 마당집 계단 벽면에 전시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연보. 위쪽에는 백 소장의 생애가, 아래쪽에는 근현대사 주요 사건 및 민중운동사가 적혔다.

한편 마당집은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 공휴일은 휴일이다.

soho090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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