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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셀프 보수 책정 안된다” 법원 제동…이사 보수 관행 바뀌나
뉴스종합| 2024-05-31 17:19
서울 강남구 1964빌딩. [연합]

[헤럴드경제=박지영·유혜림 기자] 기업의 지배주주가 이사로 활동하면서 셀프로 보수를 책정하는 국내 관행에 제동을 거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사의 보수 한도를 책정하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겸임하는 지배주주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개인적 이익을 고려해 의결권을 행사할 위험이 있다는 취지다. 이번 판단에 따라 기업들의 기존 보수 책정 관행에도 적잖은 파장이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3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7부(부장 이승원)는 심혜섭 남양유업 감사가 남양유업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총회 결의 취소의 소에서 “2023년 3월 31일자 정기주주총회에서 이뤄진 이사 보수 한도 승인 결의를 취소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심 감사는 행동주의펀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이 주주제안을 통해 선임한 감사다.

심 감사는 지난해 3월 진행된 남양유업 정기 주주총회에서 최대주주이자 사내이사인 홍원식 전 회장이 이사들의 보수 한도를 50억원으로 정하는데 찬성표를 던진 것이 상법에 어긋나 주주총회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 전 회장은 2022년 말 기준 남양유업 지분 51.68%를 가진 최대주주였다. 최대주주로서 찬성표를 던지면 사실상 자신의 보수를 ‘셀프’로 결정하는 것이 돼 부적법하다는 주장이다. 상법 제368조 3항은 “총회의 결의에 관해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되어있는데, 사내이사로서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홍 회장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다.

1심 재판부는 심 감사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주주총회) 결의가 이뤄지면 한도 내에서 보수를 받을 수 있게 돼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는 특별이해관계인에 해당한다”며 “(홍 전 회장이) 보유한 주식은 출석한 주주의 의결권의 수에 산입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홍 전 회장의) 의결권을 찬성주식수에서 제외하면 찬성주식수가 출석한 주주의 의결권의 과반에 미달한다. 결의방법상 하자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사의 보수가 아닌 ‘보수 한도’를 정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남양유업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보수 한도는 향후 개별 이사에 대한 구체적인 보수액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개별 이사에 대한 보수액을 결정하는 경우와 달리 볼 것은 아니다”고 했다. 아울러 결의가 취소돼도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아 취소 청구를 기각할 필요가 없다고도 덧붙였다.

그간 학계와 자본시장에선 주주들의 ‘셀프 보수 책정’을 열악한 지배구조의 단면 중 하나라는 지적이 많았다. 한국ESG연구원은 “국내 상장기업의 경우 기업집단에 소속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지배주주는 기업집단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불투명한 방법으로 직접 높은 보수를 수령하거나 자신의 사익추구 행위에 협력할 유인을 제공할 목적으로 계열회사 임원의 보수 계약을 설계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심지어 홍 회장처럼 이사를 겸임하는 주주임원들도 많은 게 현실이다.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국내 유가증권 및 코스닥시장 상장법인 2459개 중 3743명의 주주가 지분을 보유한 회사에서 등기이사까지 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308명(8.2%)는 지분율이 30%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 ‘밸류업’을 계기로 지배구조 개선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이 같은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국민연금은 2년 만에 '공개 블랙리스트(공개중점관리기업)'를 지정했는데, 해당 기업이 다른 임원들과 비교해 지배주주 일가인 임원에게만 과도하게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시장에서도 ‘셀프 보수’ 인상에 제동을 걸고 있다. 지난해 8월 만호제강의 2대 주주 MK에셋은 이사·감사 보수한도 결정 의안에 있어 만호제강 이사들의 의결권 행사를 금지해달라고 부산지법 서부지원에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사진이 정기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법조계에선 이번 판결이 기업들의 보수 책정 관행에도 적잖은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천준범 한국거버넌스포럼 부회장(변호사)은 헤럴드경제와의 통화에서 “상법에서 특별 이해관계인인 사람은 주주총회에서 셀프 투표를 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법원이 특별 이해관계를 너무 좁게 해온 경향이 있다”며 “보수 책정은 특별 이해관계에 해당된다고 명확히 정해줬기 때문에 더이상 셀프 투표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등기임원의 보수를 경영성과와 연동해야 바람직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현재 국내 상장기업 임원 보수에 대한 산정체계와 공시 내용은 허술한 편이라서 경영성과와의 연동성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임원 보수 공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양도제한조건부주식(Restricted Stock Unit) 등 주식 보상의 형태로 보수를 지급하는 상장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주식보상 관련 보수 정책과 구체적인 내용 역시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진단도 있다.

park.jiye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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