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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이승원·윤한결…8090 지휘자들이 온다 [MZ마에스트로] 
라이프| 2024-06-04 15:58
김선욱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경기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희끗한 백발, 존재만으로도 아우라를 풍기는 백전노장. 60대 이상의 ‘거장 지휘자’가 무대에 서야 안심했던 ‘클래식 음악계’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 지휘계에 MZ(밀레니얼+Z)세대가 속속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1988년생 김선욱(36)부터 1994년생 윤한결(30)까지 10여명의 ‘최연소 지휘자’들은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평론가인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지휘는 평생 경력을 키워가야 하고, 어느 정도 나이와 경륜이 필요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해외에선 젊은 시절부터 재능이 있으면 발굴해 키워주는 환경이 마련돼있다”며 “한국은 지휘 분야에서 젊은 지휘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들이 서서히 두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젊은 지휘자의 무대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인식과 환경의 변화 덕분이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메켈레와 같은 20대 지휘자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더 많은 기회를 줘야한다는 인식의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며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며 해외에서 지휘자 섭외가 어려워지자 한국의 젊은 지휘자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일종의 검증 과정도 끝났다”고 봤다.

지휘자 윤한결 [크레디아 제공]
백발의 노장?!…지휘자들이 젊어졌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MZ지휘자는 김선욱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36)을 필두로 이승원 신시내티 심포니 수석부지휘자(34), 정한결 인천시향 부지휘자(33), 이해 리치몬드 심포니 수석부지휘자(33), 데이비드 이 서울시향 부지휘자(36) 등이다. 여기에 한국인 최초 카라얀 콩쿠르 우승자인 윤한결(30)과 한국 최초 브장송 콩쿠르 수상자인 이든(36)도 올해 여러 연주 일정이 예정돼 있다

이들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20년대 이후다. 일부는 스타 연주자의 길을 걷다 지휘로 접어들었고, 또 세계적인 콩쿠르를 통해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 인물들도 있다.

‘젊은 지휘자’ 시대를 알린 첫 주자는 바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김선욱이다. 2006년 리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동양인 최초 1위에 오른 이후 ‘스타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던 김선욱은 한국에선 2021년 KBS교향악단 정기공연을 통해 지휘자로 데뷔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지휘자 김선욱도 최연소, 최초의 아이콘이다. 그는 올해 국내 4대 교향악단 중 하나인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으로 임용됐다. 지휘 데뷔 3년 만에 탄생한 젊은 상임지휘자이자 국내 악단 최연소 예술감독이다. 임기 첫해를 보내는 현재 김선욱은 브람스 교향곡 1번, 베토벤 교향곡 3번, 말러 교향곡 1번을 선보인 세 번의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클래식계에선 김선욱에 대해 “습득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음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뛰어난 지휘자”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오랜 연주 활동으로 “음악적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진심이 경기필 단원들의 마음을 울리는 특별한 카리스마로 다가간다”는 것이 그를 지켜본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가 부임한 이후 경기필은 ‘젊은 악단’이 됐다. 그가 임명한 부지휘자 역시 30대의 김지수(34)다.

지휘자 이승원 [목프로덕션 제공]

최근 말코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이승원도 국내외 활동이 활발하다. 현악사중주단 노부스콰르텟 출신의 비올리스트로 활동하다 10년째 지휘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승원은 서울시향, 경기필,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등 다수의 악단을 지휘했다. 이승원은 ‘성실한 지휘자’로 정평이 나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관계자는 “‘작곡가 아틀리에’ 프로그램을 통해 지휘를 맡겼는데 처음 접하는 창작곡 다섯 곡을 사전에 모두 공부해와 놀랐던 기억이 있다”며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르다”고 했다. 허명현 평론가는 “음악을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들리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며 “교통정리를 잘해 세련된 음악으로 매만지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몇 년 새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지휘자는 단연 윤한결이다. 지난해 세계적인 권위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를 정복하며 한국인 최초 타이틀을 얻었다. 그 전에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연 제1회 KNSO국제지휘콩쿠르에서 2위에 올라 ‘성장형 지휘자’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국립심포니 관계자는 “자기색과 개성이 강한 지휘자로 자기만의 해석이 뛰어난 음악성을 통해 묻어난다”고 평했다. 허명현 평론가는 “작곡으로 시작해 지휘를 병행하는 만큼 곡마다 작곡가로서 아이디어가 뛰어나다”며 “작품의 뼈대가 무엇인지, 드라마틱한 포인트를 잡으려면 어떤 점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바라보며 지휘하는 점들이 재밌고 색다른 스타일”이라고 했다.

국내 주요 악단에도 30대 부지휘자가 속속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향의 데이비드 이는 2019년 31세에 부지휘자로 발탁돼 5년째 단원들과 교감하고 있다. 서울시향의 경우 음악감독과 단원들의 평가를 종합해 1년 단위로 부지휘자 계약을 연장한다.

데이비드 이 지휘자의 강점은 ‘유쾌한 언변’과 ‘소통능력’이다. 특히 서울시향의 부지휘자는 시민 공연과 교육을 겸하기에 단원은 물론 청중과의 소통이 필수다. 서울시향은 대대로 부지휘자 자리에 30대의 젊은 세대를 기용했다. 데이비드 이 이전엔 최수열(2014년 7월 임용) 부지휘자가 35세였고, 성시연(2009년 3월)은 33세에 임용됐다. 성시연은 이후 경기필의 예술감독을 거쳐 현재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있다.

정한결 인천시향 부지휘자, 김지수 경기필 부지휘자도 탁월한 소통 능력과 친화력이 장점으로 꼽힌다.

김선욱이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경기아트센터 제공]
유연하고 열린 소통·큰 무대 경험 장점

‘MZ 지휘자’의 공통된 강점은 바로 유연하고 열린 소통 자세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음악성, 큰 무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 등이다. 허명현 평론가는 “젊은 지휘자들은 단원들과 교감 능력이 뛰어나고, 음악을 만들 때 음악적 협의점을 찾는 과정이 능숙하다”고 말했다.

과거엔 강력한 카리스마로 악단을 휘어잡는 ‘독재자형 지휘자’를 선호했다. 한 번의 음정 실수도 용납치 않고 ‘노’를 연발해 ‘토스카노노’라는 별칭이 붙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 2m의 큰 키로 체형부터 위압적인 ‘예민한 폭군’ 오토클렘페러(1885~1973), 리허설 시간엔 ‘폭군’ 그 자체이나 무대 아래에선 인자한 아버지로 불린 카를 뵘(1894~1981), 압도적 카리스마의 20세기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등이 대표적이다.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지휘자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것은 물론 100여명의 단원과 대적해 기싸움을 하면서도 이들을 이끌며 음악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기에 이들에겐 오랫동안 강력한 통솔력과 리더쉽이 요구됐다”고 말했다.

서울시향 퇴근길 콘서트 ‘과거와 미래의 교향곡:AI의 선율’을 지휘한 데이비드 이 [서울시향 제공]

시대가 달라지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지휘자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달라졌다. 허명현 평론가는 “소통형 지휘자를 요구하는 지금 시대에 젊은 지휘자들의 유연하고 열린 마인드가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봤다.

MZ 지휘자들의 또 다른 강점은 자신감이다. MZ 세대 지휘자의 맏형 격인 김선욱부터 막내 윤한결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겐 언제나 ‘경험 부족’의 우려가 꼬리표처럼 따라오지만, 정작 본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김선욱은 “지휘는 제도적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직업이 아니다”며 “부지휘자로의 경력은 없지만 많은 지휘자들의 리허설, 악단 단원들과의 만남을 통해 10년 넘게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한다.

실제로 연주자로 섰던 세계 유수 무대와 지휘 이후에 가진 크고 작은 경험들은 젊은 지휘자들의 실력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지영 전문위원은 “김선욱, 이승원은 연주자로도 상당한 위치까지 올라본 경험치가 쌓여 지휘자가 됐을 때는 자기만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음악 세계가 구축돼 성장이 빠르다”며 “악기는 물론 작곡 등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본 경험이 이들 젊은 지휘자에겐 상당한 강점으로 작용해 자신감 있게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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