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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사랑 모차르트, 아내의 재혼남 덕에 떴다[함영훈의 멋·맛·쉼]
라이프| 2024-06-09 12:35

[헤럴드경제(프라하)=함영훈 기자] 프라하 루돌피눔과 함께 ‘2024 체코 음악의 해’를 빛내고 있는 또하나의 핫플레이스, 구시가지의 에스테이트 극장은 모차르트의 희망과 체코인들의 열정이 밴 곳이다. 1783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진 이 극장은 오늘날까지 옛 모습의 외양을 유지한다.

모차르트는 탄생지이자 청소년기 성장한 곳인 잘츠부르크, 성인이 되어 자리잡고 활동한 빈(비엔나) 보다, 병마와 싸울 때 자신에게 역대 최고의 열광적인 갈채를 보내준 프라하를 더 좋아했다.

프라하 블타바 강변의 저녁
프라하성과 붙어있는 로브코비츠 고택 내 모차르트 관련 유물들

잘츠부르크에는 성장기 체벌을 당하는 등 혹독했던 음악교육 과정의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비엔나가 거점인 오헝제국의 귀족들은 모차르트를 둥근 네모 같은 존재로 여겨 싫어했다. 궁중음악가 가문 출신의 음악가라면 둥글둥글한 자세로 처세를 잘해야 하는데, 모차르트는 그의 작품에 저자거리에나 있을법한 귀족 비판 소재를 즐겨 채택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용돈 부치고 싶은 오페라 ‘돈 조반니’, 엽기 귀족 고발로 프라하 대박= 35세로 요절한 그가 말년에 힘겨운을 나날을 보낼 때, 프라하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안긴 곳이었다.

체코인들의 음악사랑은 이 나라 국민 누구든 말하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들은 프라하로 인해 웃었고, 우리는 그들을 알아봐 주었다.”

모차르트는 프라하 에스테이트 극장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사망하기 4년전인 1787년 유명한 ‘돈 조반니’를 이곳에서 초연해 시작부터 대박을 낸다.

프라하 구시가지 인근 에스테이트 극장은 모차르트의 족적이 짙게 남아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지이다.
체코 클래식 관객의 반응은 늘 열광적이다.

한국어 어감 상 갑자기, 부모님께 용돈을 부쳐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돈 조반니’는 어김없이, 방탕한 젊은 귀족의 이름이다. 모차르트 다운 소재이다. ‘돈조반니’의 엽기적인 행각을 고발하고 지옥으로 몰아넣는 내용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이 극장 앞에는 돈조반니를 지옥으로 몰고가는 양심의 망토(안나 크로미 작)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안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웅장한 객석과 샹들리에 등이 청중과 방문객에게 경외심 마저 느끼게 한다. 이 극장은 모차르트의 생애를 소재로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지이다.

프라하에서의 연속적인 성공으로 큰 용기를 얻은 모차르트는 주피터 등 후기 3대 교향곡, 클라리넷 협주곡 오중주, 마술피리, 프로이센 사중주 등을 명작들을 잇따라 탄생시킨다.

프라하 에스테이트(발음에 따라 에스타테) 극장 외관
오페라 ‘돈 조반니’에 등장하는 ‘양심의 망토’ 조각상

그의 사망으로 미완의 상태로 남은 레퀴엠은 모차르트가 자신을 괴롭히던 우울감을 딛고, 죽기 전까지 얼마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는지 잘 말해준다. 그는 죽기전, “프라하, 이 도시는 나를 온전히 이해해준다”고 말했다.

▶기본기 탄탄한 체코음악가, 열정 찾았지만 빨리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에스테이트 극장 도슨트는 “몸이 아팠던 모차르트는 자신의 음악적 유산을 간직하고, 자신이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데에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은 뒤에도 남아있을 악보는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고 한다.

공연 전날에야 오페라 곡을 모두 완성한 모차르트는 자신이 들려주는 선율에 따라 체코 음악인들이 하루 만에, 악기별로 악보를 제대로 썼는지 노심초사했는데, 공연을 마친 뒤, 그는 “두어 군데 틀렸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로, 체코 음악인들이 얼마나 기본기가 탄탄한지를 간접적으로 치하했다.

그는 다시 용기를 얻었고, 체코 모차르트 호텔 등에서 수개월 더 머물며 새로운 작품에 대한 영감을 찾아나섰다. 그렇게 좋아하던 프라하를 떠나 다시 빈으로 간 것으로 생계유지와 생활거점을 이동시키는데 따른 부담 때문으로 추정된다.

프라하 모차르트 호텔은 실제 그가 수개월 머물렀던 곳이다.
석상 바로뒤 모차르트의 방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1791년 모차르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줄 유산인 악보 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그의 악보는 피아노 주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피아노 밑, 침대 위, 부엌 가장자리, 소파 방석 틈새 등에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었다.

6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여러 이유로 4명이 죽고 2명을 건사하며 살아가야 했던 부인 콘스탄체는 불과 스물 아홉 살. 그녀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돈 많은 남자를 꼬시려고 사교장을 들락거리지만 자신에게 호감을 표한 건 부자가 아닌 덴마크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이었다.

니센은 참 건실한 사람이었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잘 아는 니센은 콘스탄체와 결혼한 뒤,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의 유산을 제대로 세상과 공유하는 일을 자임하게 된다.

프라하 음악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많은 음악가들의 악보를 마르케타 카벨코바(62) 도슨트가 조심스럽게 꺼내 한국인 탐방단에게 설명하고 있다.

▶아내의 전남편, 모차르트를 존경한 덴마크 사람= 아내의 전남편을 이토록 존경할 수가 있을까. 폰 니센은 아내의 전 남편 모차르트의 진가를 세상에 알리는 걸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외교관을 그만둔다.

이어, 모차르트의 누나 등 주변 사람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써서, 아내의 전남편에 관한 사실들을 알아내고 자료를 모았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이주한 그는 콘스탄체와 함께, 흩어져 있던 모차르트의 악보를 찾고, 모아, 필사해 널리 보급했다. 모차르트 전기 집필에 매진하면서 건강이 나빠졌고 콘스탄체가 이를 전기로 출간했다. 모차르트는 폰 니센의 노력으로 사후에 명성이 더 높아진 케이스이다.

벨기에 작가 에릭 에마뉘엘 슈미트는 ‘콘스탄체 폰 니센’이라는 전기 소설을 통해, 폰 니센이 아이 둘 딸린 가난한 미망인 콘스탄체에게 접근한 것은 이미 오래전 모차르트를 존경했고, 그의 유산을 세계인과 공유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는 점을 행간에 녹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매장지는 확인되지 않는데, 오스트리아 빈(비엔나) 음악가의 묘지에 그의 가묘가 있고, 음악인들과 각별했던 로브코비츠 가문에도 그와 관련된 유물들이 있다.

프라하성 언덕 아래 로어타운의 한 공연장 주변 거리에서 공연을 마친 단원들이 트램 길을 건너고 있다.

▶체코에서 음악공부한 모차르트의 두 아들= 모차르트의 또 다른 유족인 두 아들은 체코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고 음악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차남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는 1784년 빈에서 태어났지만, 프라하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재능이 뛰어났어도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무원 생활을 하며 아버지의 업적을 널리 알렸고, 아버지의 ‘피가로의 결혼’을 세 번 공연하면서 돈을 벌어, 밀라노 북부 농장주로 살다가 7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4남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죽기 넉달전인 1791년 여름에 태어나 훔멜 등 당대 ‘일타’ 음악가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지만 아버지 시대를 풍미하던 고전파 음악을 고집하면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음악 교사를 겸하면서 활동하다 1820년대에는 50인 작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뚜렷한 족적 없이 53세로 체코의 세계유산 온천지인 카를로비바리에서 숨졌다.

한때 카를로비바리의 이 묘가 혹시 모차르트의 시신이 묻힌 곳 아니냐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묘비의 정밀 판독 결과, 프란츠 것이었다. ‘묘비명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될 것이다. 프란츠에게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삶의 근간이었다’라고 적혀있었다.

에스테이트 극장 왕실석

1783년 처음 만들어질때 21개월이 걸렸던 프라하 에스테이트 극장은 영화 ‘아마데우스’ 촬영 직후 8년 가량 리모델링을 했다. 리모델링에 신축의 4배 기간이 걸린 것이다.

모차르트시대 분위기를 더 잘 살리면서도 더욱 튼튼하고 화려하게 지었고, 내부엔 초기엔 없었던 무대와 무대장치 등을 최신 기술로 제작했다고 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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