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중의 삶’ 노래한 故 김민기
소극장 학전서 가수·배우 배출
대중문화·정재계 등 애도 물결
“상록수처럼 우리 곁에 계실 것”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민기의 빈소. 김민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대중문화계 유명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연합] |
‘시대정신’을 노래하고, 한국 대중문화의 터전을 닦아 온 김민기 전 학전 대표가 지난 21일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던 그는 최근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며 상태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고(故) 김민기 대표에게는 싱어송라이터, 뮤지컬 연출가, 극단 학전 대표, 민주화 운동가 등 많은 수식어가 붙지만 ‘문화예술인’으로서의 그의 일관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의 별세 소식에 이은 국민적 추모의 열기는 이 시대 좋은 어른의 표상으로서 그의 발자취를 확인해주는 방증이다.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저항의 아이콘’으로 힘든 인생을 살았다. 1971년에 발표한 음반 ‘아침이슬’에 실린 동명의 곡과 ‘작은 연못’은 정치적인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 창작곡이지만, 대학생들이 집회나 시위를 할 때 불러 금지곡이 됐다. 친구의 죽음을 겪고난 후 쓴 ‘친구’마저도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을 정도였다. 이에 김민기는 노래를 직접 부르기보다 양희은 등 후배 가수에게 곡을 주는 등 창작자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유신정권이 그의 곡에 ‘금지곡’ 딱지를 붙이면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어려웠다. 노동자의 삶을 그린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정권의 감시를 피해 가수 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해 제작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지난해 10월 김민기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김형석·알리·김민기·박학기·이적·황정민·강승원·조경식 감독(앞줄 왼쪽부터 반시계방향) [박학기 제공] |
김민기는 1991년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열어 수많은 예술가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김광석·동물원·들국화·나윤선·장필순·박학기·권진원·윤도현·유리상자 등이 초기 이 곳에서 노래했다. 그가 연출해 1994년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서는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뛰어난 배우들이 배출됐다. 공연은 4200회 이상 이어졌다. ‘지하철 1호선’ 원작자인 독일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는 “위대한 시인이자 음악가를 잃었다.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한없이 겸손한 자유 투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하철 1호선’의 성공 이후 김민기는 오히려 돈이 안되는 어린이 연극과 뮤지컬을 만들어 주위의 걱정을 샀다. 김민기의 어린이 사랑은 1973년 신정야학을 만들어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공부를 가르쳤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 달동네 어린이들을 위한 공공 보육시설 ‘해송유아원’ 건립에도 발벗고 나섰다. 특히 학전에서 어린이 무대가 있는 날이면 그는 매번 직접 객석으로 내려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곤 했다. ‘학전’이 재정난에도 어린이 무대를 20년 동안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어린이를 향한 그의 진심 덕분이었다.
후배들은 김민기에 대해 “그저 ‘상록수’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사실 대중들은 ‘K-콘텐츠의 이노베이터(혁신가)’로 기억한다. 인간과 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후세에 남길 만한 좋은 콘텐츠를 다수 남겼기 때문이다. 민중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 그리고 학전을 통한 예술인의 양성은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못했을 성과다.
한편 지난 22일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김민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대중문화계 유명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학전 독수리 5형제 중 한 명인 배우 장현성은 “조금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셔주셨으면 감사했을 텐데 마음이 아주 황망하다.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빈소를 찾아 오랜 시간 머문 황정민은 눈이 불거진 채 장례식장을 나섰고, 1997년 12월 학전에서 데뷔한 유리상자 이세준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던 시절에 싸워주신 분”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가수 윤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큰 산 같은 분”이라며 고인을 기억했다.
이밖에 고인과 대학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이수만 전 SM 총괄 프로듀서 뿐 아니라 가수 김창완·김광진·이은미·권진원·노영심·장기하·알리·박시완과 배우 이호재·문성근·강신일·이병준·류승범·김희원·김대명·배성우 등도 빈소를 찾았다.
고인의 마지막 걸음은 그가 일생동안 지켜온 학전에서 끝을 맺는다. 오는 24일 오전 발인 이후 학전 마당과 극장을 둘러본 뒤 천안 공원묘원의 장지로 향해 영면에 든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이미영 씨와 2남이 있다.
서병기·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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