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영끌하다 ‘벼락거지’ 된 男…수백년 뒤 2000억대에 ‘대반전’ [0.1초 그 사이]
라이프| 2024-08-04 00:20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렘브란트,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확대)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보유 자산만 3경원으로 추정되는 세계적인 유대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네덜란드의 국보급 거장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Rembrandt Van Rijn).

이 둘에 대해 듣고 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단박에 작품 두 점을 연상하게 될 거라는 것이죠.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중에 역대급으로 비싸게 팔린 그림으로 꼽히는 두 점의 회화이기도 합니다.

바로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의 초상’(1634)과 ‘기수’(1636) 입니다. 작품당 무려 2000억원이 넘는 값에 거래됐거든요. (그림 한 점 값이 한 해 동안 팔린 농심 짜파게티 전체 매출과 맞먹을 정도로 비쌉니다.)

렘브란트,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의 초상, 1634.(확대)

19세기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던 로스차일드 집안이 두 작품을 구입해 각각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소유한 이래 단 한차례도 공개된 적이 없었으니,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 밖에요. 이 작품들은 소위 잘나가다 ‘벼락거지’가 되기 직전의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이렇게나 막대한 돈을 들여 렘브란트의 대작들을 사들였을까요. 작품들을 구입한 ‘큰 손’은 다름 아닌, 네덜란드 정부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특별했길래 정부까지 나서서 자금을 동원해 그림 구매에 열을 올렸을까요. ‘빛의 화가’라는 명성을 가진 렘브란트와 그의 최고가 거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펼쳐집니다.

공부에 흥미 없던 아들, 공방 보냈더니 유명 작가 되다

화가로서 렘브란트는 꽤 순조롭게 시작했습니다. 방앗간집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인문학과에 진학했지만, 학교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모는 렘브란트가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대가의 공방에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손을 썼죠.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렘브란트를 눈여겨봤거든요.

역사 화가로 유명한 야코프 반 스바넨뷔르흐 밑에서 도제식으로 가르침을 받게 된 렘브란트. 그는 스물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네덜란드에서 인기 있는 초상 작가로 단숨에 등극합니다. 당시 그가 그린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대중들의 인기를 끌면서 하루아침에 유명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됐기 때문인데요.

렘브란트,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이 그림은 가로 길이만 2m가 넘는 대작입니다. 제목과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해부학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생생한 풍경이 보입니다.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이 바로 니콜라스 튈프 박사인데요. 창백한 시신이 누워있고요. 튈프 박사가 일곱 명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에서 금방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나올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특히 표정이 선명하고 다채롭습니다. 바로 인물의 주변 부분을 어둡게 처리했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효과죠. 이로 인해 그림에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상황에 집중할 수 있는 건데요.

카라바조, 메두사, 1631. [우피치 미술관]

이처럼 렘브란트는 작품 속에 명암 대비를 아주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기법을 ‘키아로스쿠로’(chiaroscurro) 기법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어어로 ‘키아로’(chiaro)가 빛을 의미하고요. ‘오스쿠로’(oscurro)가 어둠을 뜻합니다. 주로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 중 배경이 어둡고, 인물이 밝게 묘사된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예를 들면 17세기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 카라바조(1571~1610)의 작품들이 그렇습니다. 빛의 정도에 따라 어떤 부분은 아주 강렬하게 드러나고, 어두운 부분은 아예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작가가 정확히 의도하는 대로 작품 속 일부를 강조해 조명할 수 있다는 부분이 키아로스쿠로 기법의 특징이죠.

이런 표현 방법으로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가 렘브란트였습니다. 렘브란트는 어린 나이에 유명해졌고 무려 20대부터 밀려드는 그림 의뢰로 막대한 돈을 버는 화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단,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까지만의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는 끝내 파산에 이르게 되거든요.

소위 잘나가는 시기에 자신을 그린 모습. 렘브란트, 34세의 자화상, 1640.(확대) [영국 내셔널갤러리]
죽기 직전에 자기 자신을 그린 그림. 렘브란트, 63세의 자화상, 1669. [국립중앙박물관]
‘서른 살의 자화상’ 정부가 거액에 구매한 까닭

그가 몰락의 길을 걷기 전, 다시 말해 승승장구할 때 그린 그림이 바로 ‘기수’ 입니다. 렘브란트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된 그림으로, 그가 서른 살에 그린 자화상인데요.

그림을 잠시 볼까요. 화면에는 렘브란트가 참전 군인이 입는 기수 복장을 하고 자신감에 찬 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죠.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린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창 80년 전쟁(1568~1648)을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전쟁 후반부부터 네덜란드는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시민들의 헌신과 노력의 결과로 전쟁 끝에 독립을 쟁취하게 됐고요.

렘브란트, 기수, 1636.(확대)

그런데 정작 이 작품은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구입해 프랑스에서 177년간 보유하고 있었거든요. 그 가치를 알아본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을 국보로 지정했을 정도고요. 18세기 들어 금융업으로 떼돈을 벌기 시작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 최대의 예술품 수장가이기도 하다 보니 이런 수집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로스차일드 가문의 라이오넬(1808~1879)은 렘브란트를 필두로 17세기 네덜란드 유화를 전문적으로 찾아 모았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작품을 얼마나 고국으로 가져오고 싶었을까요. 평생을 걸쳐 100여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긴 네덜란드의 대표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인데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숭고한 의지가 깃들여진 상징적인 작품이었으니 말입니다. 자신들의 빛나는 황금시대를 거장의 작품으로도 기억하고 싶었을 겁니다.

2019년 렘브란트 ‘기수’ 앞에 선 네덜란드·스페인 국왕 [EPA/연합]

프랑스 정부가 구매를 포기하고 공개 시장에서 거래를 허용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곧장 작품 구매를 추진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작품 구입을 위해 당시 예산으로 1억7500만유로(2331억여원)를 배정했습니다. 일부 금액은 렘브란트 협회(1500만유로)와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기금(1000만유로) 등이 부담하기로 했고요. 정부는 의회에 작품 구매 계획 승인을 요청했고, 의회는 이를 일사천리로 처리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작품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렘브란트 역대급 그림은 프랑스·네덜란드의 공동 소유

렘브란트가 스물여덟에 그린 그림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의 초상’은 어떨까요. 오늘날까지 거래된 렘브란트의 작품 가운데 두 번째로 비싼 값에 판매된 작품입니다.

렘브란트가 이 작품을 그릴 당시는 경제력을 갖춘 시민들이 미술품 구매에 관심을 가지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소위 ‘잘나가는’ 자신의 화려한 모습을 초상화로 담는 것이 큰 인기를 끌었죠. 그림 속 두 주인공인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결혼 즈음에 렘브란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오늘날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자신들의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고 싶어 웨딩 촬영을 하는 것과 다름 없는 건데요. 그렇게 렘브란트는 실물 크기 캔버스에 신랑과 신부를 각각 그렸습니다.

렘브란트,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의 초상, 1634.

그런데 이 그림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무려 139년간 나홀로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판매 의사를 밝히자 프랑스와 네덜란드 정부가 즉각 관심을 보였죠. 명작을 소장하기 위한 양국의 신경전은 상당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그림값 1억6000만유로(2120억여원)를 절반씩 지불하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구입 절차를 마무리했을 정도입니다.

공동 구매한 초상화를 어떻게 양국이 나눠 가질 수 있을까요. 게다가 신랑, 신부가 같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초상화인데 말이죠. 그래서 양국 정부는 순번을 정해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네덜란드의 라이크스 미술관 등에서 번갈아 전시하는 방안을 세웠습니다. 세계적인 부호 집안이 오랜시간 독점 소유해온 걸작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만들어진 겁니다.

‘영끌’로 집 샀다가…민병대 미움 사 ‘나락’으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요. 사실 렘브란트의 부와 명예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화가였지만 서른다섯에 그린 이 그림 한 점 때문에 한순간 나락에 빠진거죠.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민병대원들을 그린 ‘야경’이 바로 그 작품입니다.

그림 의뢰한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자신들의 멋진 모습이 역사에 기록되길 바랐습니다. 당시 집단 집단 초상화는 주문자들이 나눠 돈을 낸 만큼 한 사람 한사람을 그려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절제된 모습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당시 전통적인 집단 초상화를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죠.

렘브란트, 야경, 1640~1642. [암스테르담국립박물관]
작품 확대.

그런데 렘브란트는 그 틀을 깨부쉈습니다. 작품 전체적인 구성을 고려해 인물들을 자유로이 배치한 겁니다. 무엇보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모습이 부각됐습니다. 이는 분명 관습을 깬 걸작이었지만, 정작 초상화를 주문한 당사자들의 불만이 들끓었습니다. 앞줄 가운데 대장은 크게 그려져 있는데, 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은 작게 그려져 있고요. 어떤 사람은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가늘게 뜬 눈만 드러나 있습니다. 어두운 조명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까지 있죠. 그림 속 수많은 인물들의 시선도 제각각입니다. 초상화 주문자들이 돈까지 내고 부탁한 그림인데, 어수선해 보이는 자신들의 그림 속 모습이라니요. 이들은 끝내 위신이 손상됐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 렘브란트에게 밀려들었던 작품 주문이 뚝 끊겼습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인 민병대의 악평이 그의 발목을 제대로 잡은 겁니다. 당시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호화 저택을 집값의 75%가량 대출받아 산 상태였는데요. 네덜란드 평균 집값의 10배나 넘는 고급 주택이었습니다. 요즘 시쳇말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을 해서 무리하게 집을 샀던 건데요.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던 렘브란트는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됐고, 그렇게 한순간에 몰락하게 됩니다.

풍요로움에서 비참함으로 완전히 추락한 렘브란트의 삶. 그러나 그가 남긴 작품 값은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수천억원의 국고를 할당해 나서지 않으면 구입조차 고려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가치가 상당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독보적인 렘브란트의 존재는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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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Sale of Rembrandt Portraits Owned by Eric De Rothschild Worth €150 Million Sparks Controversy, Lorena Muñoz-Alonso, Artnet.

Rembrandt Portraits May Come Home, for Record Price, With Government Help, Nina Siegal, The New York Times.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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