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마담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
- 출생 1721년 ~ 사망 1764년
장 마르크 나티에,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퐁파두르 부인’, 1746. |
잔 앙뜨와네트 푸아송(Jeanne Antoinette Poisson)
마담 퐁파두르의 본명이다.
동그랗고 깊은 눈매, 조화로운 이목구비와 갸름한 얼굴,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선, 그녀는 타고난 미모로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겸손과 사려깊은 성품, 뛰어난 춤과 노래 실력, 예술적 감각 그리고 교양까지 두루 갖춘 그녀였다. 여기까지 보면 마담 퐁파두르는 마치 우리 시대에 미담이 넘쳐 나는 인품과 지성을 겸비한 아이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살던 시기에는 엄연히 계급이 존재했고 평민에 불과했던 그녀는 계급을 뛰어넘는 성공을 위해 장기간에 걸친 트레이닝과 교육을 받게 된다.
〈프랑수아 부셰, ‘화장대에 있는 잔 앙뜨와네트’, 1758, 포그 박물관〉 동그랗고 깊은 눈매, 정돈된 이목구비, 하얀 피부와 고운 선을 가진 잔 앙뜨와네트 |
부르조아 출신의 세금 징수원인 샤를 투르넴이 그녀의 법적 후견인이었는데 그는 잔(마담 퐁파두르의 본명)의 어머니 루이즈 마들렌의 애인으로 비정상적이리 만큼 막대한 양육비와 교육비를 지불하며 수준 높은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잔의 친부가 아니냐는 소문도 무성하였다.
잔이 9살 무렵, 먼 훗날 그녀가 후에 국왕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점성술사의 말에 그녀의 어머니는 잔을 ‘레네트(Reinette: French for Little Queen)- 프랑스의 작은 여왕’이라고 부르며, 왕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러려면 베르사유 궁정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고, 베르사유 궁중 예법과 교양 그리고 학식을 두루 갖추어야 했다. 더불어 연회에 어울리는 춤과 노래 솜씨, 고급스러운 화법을 구사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샤를 투르넴과 마들렌은 잔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시켰다.
잔이 만일 귀족이었다면 상류층으로서 당연한 교육이라 볼 수 있었지만 평민여성에게는 매우 특별한 교육이었다. 그러나 평민이었던 잔이 아무리 노력해도 왕의 여자가 되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까지였다. 볼테르*가 후에 표현한 ‘바르고 선량한 활기 넘치고 매력적이며 다재다능한 여성’이었던 잔의 삶의 방향은 이렇게 정부로서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가.
부르죠아 출신으로 문학적으로 먼저 크게 성공하여 사회적 명성을 얻은 그는 귀족과의 말다툼으로 결투를 신청했으나 평민 출신이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 된다. 이 시기 볼테르는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고, 프랑스에 비해 다소 개방적인 영국에서의 경험으로 철학서간(1734)를 발간하고 백과사전(1751-1781)에도 여러 항목을 집필한다. 또한 과학의 합리성을 높이 평가하여 과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한다.
〈프랑수아 부셰, ‘마담 드 퐁파두르’, 1750, 루브르 박물관〉 사교계에 입문한 퐁파두르. 음악서적과 지구본의 배치는그녀의 예술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자 하는 장치로 여겨진다 |
사교계에서의 필요한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추었으니 이제 루이 15세와의 로맨틱한 만남만이 남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시대가 계급사회란 걸 간과한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왕과의 조우는 귀족들에게만 허락되었고, 평민인 잔에게는 왕을 만날 수 있는 다음 단계의 계단이 필요했다. 잔은 19살의 나이에 샤를 투르넴의 조카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과 결혼하였고 그 때부터 파리 사교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처녀는 살롱에 드나들 수 없었기 때문에 결혼 후, 살롱을 열어 유명세를 타면서 베르사유궁에서도 그녀의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한발 더 나가 샤를 투르넴은 잔 부부에게 왕의 사냥터 근처의 저택을 선물하는데, 그 곳에서 잔은 루이 15세의 눈에 띄기 위해 밝은 색의 옷을 입고 마차를 왕 앞으로 몰아 왕의 눈에 띄는 성과를 얻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루이 15세와의 인연은 왕의 무도회에서 재현되었고 결국 노르망과의 짧은 부부생활은 4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고 왕의 총애를 입으며 베르사유 궁에 입성하게 된다.
세 사람(잔,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후견인 샤를 투르넴)의 왕의 여자 만들기 프로젝트 1단계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입성한 궁에서의 삶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그녀의 비천한 출신을 들먹이며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한 예로 왕세자 또한 그녀가 왕비를 처음 알현하는 날, 무안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귀족들은 그녀의 본명에서 따온 푸아소네이드(생선 스튜)라는 별명을 지어 그녀를 비아냥거렸다. 마담 퐁파두르는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내야 했다. 이렇게 왕의 여자로서 자리 굳히기 프로젝트 2단계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경쟁자와의 수많은 암투를 이겨내고 왕의 소울메이트가 되어 20년간 소위 ‘왕관 없는 여왕’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프랑수아 부셰, ‘마담 드 퐁파두르’, 1759, 월리스 컬렉션, 런던, 영국〉 로코코의 전설로 불리며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한 퐁파두르 |
첫째, 그녀가 유년기부터 살롱의 지식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쉼 없이 배웠던 인문학적 지식과 예술적 소양이 루이 15세든 그 누구가 되었든 그녀를 끊임없이 곁에 두고 싶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베르사유 궁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파티와 향락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예술은 물론 철학과 과학에까지 깊은 관심을 보이며 후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는 베스사유 궁의 소위 ‘인싸’로 다채로운 궁정 공식 행사나, 무도회에서도 주인공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예술산업의 큰손 후원자이면서 유행을 만드는 인플루언서라고 할까. 뛰어난 노래와 춤실력으로 주인공을 맡아 완성도 높은 공연을 만들어냈다. 오늘날로 치면 뮤지컬이나 콘서트의 주인공이자 기획,제작까지 참여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CEO랄까. 루이 15세는 심심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그녀의 공연을 특히 즐거워했고, 그녀는 전문가 수준의 공연을 통해 왕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나갔다. 오죽하면 루이 15세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퐁파두르밖에 없다고 했을까.
〈프랑수아 부셰, ‘마담 드 퐁파두르’,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독일〉 아름다운 그녀의 거의 모든 초상화에 등장하는 서적.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퐁파두르를 상징한다 |
두 번째, 그녀의 살아남은 성공비결은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에 있었다.
국가의 근간은 강력한 군사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그녀는 강력한 군인 간부 육성을 위해 파리 시내에 왕립 군사학교를 설립하였다. 예산 문제를 들먹이며 강력히 반대하는 귀족층에 굴하지 않고 후원금을 모아 가난하지만 똑똑한 소년들이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게 만들었다. 훗 날, 가난했던 나폴레옹 또한 이 사관학교에서 무료로 교육을 받았으니 만약에 그녀가 왕립 사관학교를 건립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과 관련된 유럽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또한, 루이 15세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후원한 계몽주의 철학가들의 이론이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었으니, 절대왕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그녀가 절대왕권의 붕괴를 앞당긴 형국이 되었다. 더불어, 지식 대중화에 이바지한 계몽주의 철학의 산물인 백과사전도 그녀가 루이15세와 귀족층, 종교인을 설득하고 막대한 자금을 후원하였기에 편찬이 가능했다.
그녀는 산업 진흥에도 힘썼다. 당시 상류층에서는 고급 도자기가 유행하였는데, 프랑스의 도자기 기술이 다소 떨어져 높은 온도에서도 견디는 내구성과 심미성을 갖춘 중국과 일본 도자기의 수입으로 막대한 돈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그녀는 이 점을 안타까워하여 세브르 공장에 거금을 투자하여 프랑스의 도자기를 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내수산업을 활성화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마담 드 퐁파두르’, 루브르 박물관〉 배경이 되는 서적은 볼테르의 ‘앙리아드’(1723),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을 주장한 ‘법의 정신(1748)’, 디드로 외 다수의 저자 ‘백과사전’(1751) 퐁파두르는 법학, 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였고 예술, 문학, 철학,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
여러 방면의 걸친 그녀의 통찰력은 패션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바로 전시대의 화려한 바로크 양식을 그녀 특유의 로코코 양식으로 변화시키며 복식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바로크 양식 패션은 지나친 확대와 과장으로 다소 기괴해 보인다. 퐁파두르 시대 이후의 로코코 양식 또한 30센티가 넘게 띄운 헤어스타일과 지나친 장식으로 아름답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반면에 그녀가 해석한 로코코 양식은 당시 기준으로, 과하지 않은 실루엣과 장식, 단정하게 빗어넘긴 헤어 스타일과 심플한 머리장식으로 화려함과 절제됨의 균형을 이룬다.
〈프랑수아 부셰, ‘마담 드 퐁파두르’, 1750, 국립 스코틀랜드 미술관〉 퐁파두르 핑크라 불리는 분홍색, 화학자와 함께 개발한 핑크색을 도자기와 복식에 적용하였다 |
또한 도자기 염료에서 개발을 후원한 ‘퐁파두르 핑크’를 복식에 최초로 사용하였다. 시대를 초월하는 미적감각으로 현대 서양복식사 서적 표지를 가장 많이 장식하는 그녀의 복식은 지금 봐도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그 느낌!
단아한 머리와 절제된 패션으로 화려하면서 지적인 면을 강조한 퐁파두르는 로코코 시대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
42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변함없는 루이 15세의 소울 메이트이기도 했지만 반면 국고를 고갈시킨 정부로써 국민의 원망을 사야 했던 마담 퐁파두르.
그녀에 대한 극과 극의 평가를 두고 파란만장한 그녀를 삶을 현대의 관점으로 재단하기엔 다소 조심스럽고 난해하다. 파스칼의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그녀가 귀족이었다면, 남자였다면, 아니 왕으로 태어났다면 18세기 프랑스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혼자 해보며 글을 마친다.
글·사진 = 권혜수 우석대 교수
정리 = 정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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