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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의 두 번째 스무 살…“나는 늘 개복치였고, 맹그로브였다” [인터뷰]
라이프| 2024-09-10 12:04
가수 윤하 [C9엔터테인먼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별칭이 많았다. 유독 비(雨)와 관련한 노래가 많아 ‘비 언니’로 불렸고, 우주의 공간에서 별과 별 너머의 세계를 노래해 ‘이과 언니’로도 불렸다. ‘사건의 지평선’(블랙홀의 경계면)에서 예측하지 못한 이별을 노래했고, 보이저호를 의인화해 꺾이지 않는 마음(‘오르트구름’)을 그렸다. ‘우주를 건너’ 먼 길을 유영한 윤하는 이번엔 깊고 어둔 심해로 향했다. 바다를 헤엄쳐 ‘태양물고기’를 만나고, 뭍으로 나오려다 ‘맹그로브’도 마주한다.

최근 정규 7집 ‘그로우스 띠어리(GROWTH THEORY)’를 발매하고 만난 가수 윤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생물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번 앨범의 시작은 은하수를 보러 떠난 여행이었다. 2022년 ‘사건의 지평선’이 ‘역주행 신화’를 쓴 이후, 윤하는 호주로 홀연히 여행을 떠났다. 소금기 가득한 모래 바닥을 딛고 자란 맹그로브 나무는 그 때 처음 만났다.

“하루에도 썰물이 열두 번씩 오가고, 무생물이 와서 몸에 달라붙고, 물고기들의 터전이 돼준다 하지만 다시 물이 들 땐 또 담금질을 당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견디더라고요. (현지 가이드는) 맹그로브는 악취가 심하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던데, 저한테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어요.”

이곳에서 새 앨범의 많은 이야깃거리를 얻었다. 신보는 윤하의 ‘띠어리’(이론) 3부작 중 두 번째 이야기다. 2021년 11월 발매한 6집 ‘엔드 띠어리(END THEORY)’에서 담아낸 우주를 향한 시선을 바다로 옮겨왔다. 이 작품엔 세계관이 있다.

“주인공 소녀가 있어요. 지구와 충돌하려 날아오는 혜성이 보이저호를 만나 소행성의 충돌에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소녀는 ‘제발 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혜성은 소녀의 기도를 받아 블랙홀로 궤도를 꺾어 자신을 희생하죠.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늘 잘 알고 익숙한 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 때도 있다는 이야기의 두 번째 시리즈예요.”

가수 윤하 [C9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수 윤하 [C9엔터테인먼트 제공]

우주에서 넘어와 바닷속 생물들을 만난 새 앨범에선 윤하가 잘하는 ‘의인화법’이 담겼다. 소녀는 그의 여정에서 맹그로브와 개복치, 연어떼를 만나고 태평양에 잠든 로켓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윤하는 “소녀는 나를 투영한 것일 수도 있고, 듣는 분들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다”며 “소녀가 여러 생명들을 보고 용기를 얻는 내용”이라고 했다.

타이틀곡은 ‘태양물고기’. ‘해파리가 주식’인 개복치의 영어명 ‘선피쉬(Sunfish)’를 한글로 풀어냈다. “수많은 어종 중 왜 이 친구만 왜 해의 이름을 가진 건지 궁금”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개복치의 수족관 폐사 사건도 있지만, 사실 바다에서 정상적으로 살았을 땐 20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행동 반경도 넓어 수면 위에서 심해 800m까지 오가고, 바다 생명에도 도움이 되고요. 처음엔 외계인 같았지만 볼수록 귀여웠어요. 요즘엔 SNS가 워낙 발달하다 보니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가 아니라도 주목을 받지만, 그 이면엔 진짜 내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어요.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히, 개복치 같은 사람이 되자는 의미를 담아봤어요.”

현실의 괴로움은 이상과의 부조화에서 온다. 윤하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내 이상은 하늘같이 드넓은 대인배, 무한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아 괴로운 순간도 많다”며 “하늘을 지향하지는 못해도 하늘을 담은 바다를 지향할 수는 있지 않나. ‘바다의 태양’(Sunfish)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이 곡을 만들었다”고 했다.

10개의 곡을 꽉꽉 채워넣은 이번 앨범엔 보기만 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 대신 잘 알려지지 않고, 굳이 마음을 두지 않는 생물들이 잔뜩 출연한다. 그는 “개복치와 맹그로브는 비슷한 부분이 있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부류인 데나 고래와 개복치 중 선택하라 하면 무조건 고래의 압승이다”라며 “잘 알려지지 않는 것, 선택받지 못하는 것, 그런 것들에 정이 간다”고 말했다.

윤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2004년 일본에서 먼저 데뷔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다시 맞은 두 번째 스무 살에 돌아보니 그는 “내 삶은 늘 개복치와 맹그로브 같았다”고 말했다. 개복치의 수명 20년은 윤하의 데뷔 20주년과도 맞닿아 ‘운명’처럼 이번 음반으로도 안착했다. ‘비밀번호 486’, ‘우리 헤어졌어요’, ‘우산’과 같은 히트곡을 냈고 내년부턴 고등 교과서의 문학 지문으로 수록되는 ‘사건의 지평선’은 차트 역주행을 달성했지만, 사실 윤하는 오랜 시간 저평가된 싱어송라이터였다.

“‘사건의 지평선’ 전까지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신경쓰지 않았는데 신경쓰게 된 말이 있어요. ‘나만 알기 아까운 가수’라는 수식어였어요. 늘 한 발짝 나아가길 바랐고, ‘나만 알면 됐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문득 팬들의 어깨를 펴주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게 됐어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유명하지 않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개복치나 맹그로브도 더 알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때는 슬럼프도 있었다. 2012년 7월 ‘슈퍼소닉’을 낸 뒤 몇 번의 미니앨범을 냈고, 5~6년 정도 하염없이 헤맸다. 그 무렵 윤하에겐 성대결절도 찾아왔다. 당시를 돌아보며 그는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하던 때”라고 했다. 지난한 시간들을 보내온 지금 그는 직접 쓴 팬송의 노랫말처럼 ‘천 번 넘어져도 천 번 일어나는’(‘새녘바람’ 중)사람이 됐다.

20년을 달려온 윤하는 앞으로의 20년도 꿈꾼다. 그는 “조용필 선배님처럼 하고 싶지만, 그건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인 것 같다”며 “무대에 세워주실 때까지 음악을 놓치 않겠다”고 했다. 팬들과 오래도록 품어온 약속이 하나 있다.

“2041년 독도에서 금환일식(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지 못하면서 태양의 형체가 흰 띠 모양으로 보이게 되는 일식의 한 종류)이 있는 날, 그곳에서 음악회를 열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약속이 있으면 나아가는 느낌이 들어요. 되든 안 되든 힘이 되니까요. 2060년엔 ‘무엇보다 살아있기’, ‘게장 비빔밥 형태로 디너쇼를 하기’와 같은 약속도 했고요. 살면서 좌절하더라고 이 약속이 ‘잘 살아보자’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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