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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콘텐츠의 글로벌 소비를 위해 생각해볼 문제들-‘전,란’ ‘쇼군’ ‘사무라이의 시대’[서병기의 문화와 역사]
라이프| 2024-10-18 10:57
영화 '전.란'의 한 장면.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전세계에 통할만한 K-콘텐츠는 계속 이어질 것인가?

K-콘텐츠는 음악, 드라마, 영화, 예능의 글로벌화에 이어 한강 작가가 최근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K-문학 열풍까지 불고 있다.

드라마와 예능, 영화가 글로벌하게 소비되는 형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글로벌 OTT에 오리지널 시리즈 형태로 K-콘텐츠가 제작되는 경우와 글로벌 OTT를 대거 소유하는 미국이 K-콘텐츠를 소재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다. 전자는 '오징어 게임'이고, 후자는 '파친코'가 해당된다. 한 나라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형태 모두 활발하게 제작되어야 한다.

▶미국에서 제작되는 일본 콘텐츠

미국에서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를 소재로 하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디즈니플러스의 팩션 사극 '쇼군'(2024)이다. 서양인들이 만드는 동양 콘텐츠는 원작 역할을 할 소설이 있는 게 좋다. 시리즈물 '파친코'도 8살에 뉴욕으로 이민간 이민진 작가가 2017년에 공개한 소설 '파친코'가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한강 작가가 전세계에 일으킨 K-소설 열풍이 K-영상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원천지여서 반가울 수밖에 없다.

디즈니플러스의 미국드라마 '쇼군'의 주인공 요시이 토라나가 역할을 맡은 일본배우 사나다 히로유키.

10부작 시리즈물 '쇼군'도 제임스 클라벨이 1975년 발표한 역사소설 '쇼군'을 원작으로 했다. 1980년에 방영돼 미국인에게 일본 스시를 친근하게 만든 미국 드라마 '쇼군'의 리메이크작이기도 하다.

17세기초 일본의 정치적 암투를 그린 '쇼군'은 지난 9월 15일(현지시간) 미국 LA 피콕 극장에서 열린 제76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시리즈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사나다 히로유키), 여우주연상(사와이 안나) 등 무려 18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일본 최고권력자인 태합이 죽고난 후인 1600년부터가 시대적 배경이라면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상시킨다. 도요토미는 사후 자식이 너무 어려 태합이 지정한 5명의 장군이 집단지도체제(5대로)로 통치한다. 드라마의 첫장면은 유럽에서 온 선박이 표류하다 일본 연안에 들어왔고, 선원들은 일본군에 의해 모두 포로로 잡힌다.

'쇼군'의 사나다 히로유키.
'쇼군'에서 몰락한 아케치 가문의 딸인 토다 마리코 역으로 열연한 배우 사와이 안나. '파친코'에도 나오미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이어 '5대로'중 한 명으로 생전 태합의 신임을 얻었던 요시이 토라나가(사나다 히로유키)가 에도에서 오사카성으로 입성한다. 토라나가를 견제하는 이시도 카즈나리 등 '4대로'는 토라나가가 6쌍이나 결혼시켜 영지가 2배로 늘어난 것에 불만을 품고 인질로 삼기위해 오사카 성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정재에 이어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사나다 히로유키의 노련한 연기로 살아있는 캐릭터가 된 토라나가는 도큐가와 이에야스를 모티브로 삼은 캐릭터다.

이렇게 천천히 유장하게 진행되는 것 같아도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무사들과 여자들도 '삶의 의미'가 끝난 지점에서 할복과 자결을 먼저 주군에게 허락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명예로 여긴다. 권력다툼 과정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이 상황들을 다른 문화권에서 보면 섬찟할 정도다.

미국에서 만든 일본 역사물이라 해도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주연인 일본배우 사나다 히로유키는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 아울러 일본으로 표류한 영국 출신의 항해사 미우라 안진(존 블랙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제 3자의 시선까지 들어가 있어 외국인이 보기에도 흥미롭다.

넷플릭스 팩션다큐 6부작 '사무라이의 시대'

넷플릭스 팩션다큐 6부작 '사무라이의 시대'(2021)는 '쇼군'보다 조금 빠른 16세기가 배경이다. 전국(센고쿠) 시대 혼란기 잔혹한 내전에 돌입한 16세기 일본의 난세를 평정하고 권력을 움켜쥐려는 과정에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3명의 사무라이 영웅이 나타난다. 이 3인을 중심으로 그 격변기 역사를 미국과 일본인 전문가의 해설과 재연을 통해 보여준다.

1부 노부나가의 비상편에는 노부나가가 농민을 병력으로 훈련시키고, 포르투갈 선박에서 구한 화승총을 전쟁의 유력한 무기로 활용한다. 노부나가 다이묘(大名)는 조직관리능력이나 정보력에서도 한수위였지만 동생을 죽이고, 포악하고 악명 높은 만행으로 적들이 생긴다. 경쟁자들에게 지속적 분노를 일으켜 결국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노부나가는 부하를 혼 낼때 모두 보는 데서 호통을 치거나 칼로 베어버린다. 공개 망신주기의 끝판왕이다. 이런 리더십은 권력장악은 쉬울지 모르지만, 오래 갈 수 있는 리더는 아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33세에 죽는 서양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브루투스 등의 공화파에게 암살당한 카이사르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오다 노부나가 군대의 보병생활로 시작해 지도자로서 잠재력을 검증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급을 거듭하며 새로운 리더로 부상한다.

이처럼 '사무라이의 시대'는 영웅 3인들의 야망과 성격이 대조적으로 잘 드러나고, 욕망추구과정에서 충성과 배신, 연합과 음모, 갈등과 전쟁 등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연결돼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곳곳에 고증의 오류가 보인다. 특히 임진왜란기 조선의 모습은 복식이 어색하고, 이순신 장군은 아예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홍의장군 곽재우를 흥미거리로 등장시켰다는 느낌마저 든다.

영화 '전, 란'.

▶한국역사물인 넷플릭스 영화 '전.란'의 큰 해외반응

미국에서는 일본 역사 못지 않게 한국의 역사도 소재로 삼아 제작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한국 역사를 조명한 영화 '전, 란'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1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전,란'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에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쇼군'과도 비슷한 시기의 조선을 다룬다. '쇼군'에서는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대사들이 나오는데, 그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전,란'은 공개후 3일만에 7,500,000 시청 수(시청 시간을 작품의 총 러닝 타임으로 나눈 값)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영화(비영어) 부문 3위에 등극했다. 또한, 총 58개국에서 TOP 10 리스트에 랭킹됐다. 아시아에서는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폴, 사우디아라비아, 태국, 대만, 튀르키예, 베트남, UAE가 있다. 흥미로운 건 일본도 포함됐다는 것. 임진왜란기를 다루는 한국역사물은 일본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전,란'은 일본에서 부정적인 리뷰가 별로 없다.

영화 '전,란'.

'전, 란'이 유럽에서는 프랑스, 헝가리, 그리스,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웨덴, 폴란드, 미주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페루 등이 TOP10안에 포함되는 등 전 세계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증명했다.

'전,란'에 대한 주요 외신 리뷰를 보면, "풍부한 영상미부터 권력에 대항해 진실을 외치는 민중의 이야기를 담은 주제까지, '전,란'은 현대적 감각이 번뜩이는 사극임에 틀림없다."(영국 Screen Daily), "정교하고 예술적으로 설계된 액션 시퀀스에 더해 영화가 전하는 사려 깊은 가치관 역시 여운을 남긴다. 반란 영웅인 주인공을 조명하지만 김상만과 박찬욱 감독은 결국 민중이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미국 Deadline), "김상만 감독은 스펙터클한 검술 액션을 통해 시각적 세련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였다"(홍콩 South China Morning Post) 등의 호평 세례를 이끌어내고 있다.

▶한류 콘텐츠의 핵심 경쟁력과 '전,란'과의 관계

'전, 란'은 어떤 점이 해외에서도 매력을 가지게 했을까? 지극히 지역적인 이야기가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생각해야 할까?

한류콘텐츠로 성공한 이유를 분석하면, 한국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생긴 과도한 현상과 모순점이 콘텐츠를 만드는 데는 좋은 조건이 된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나왔다. K-콘텐츠에는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나온 양극화와 빈부격차, 젠더갈등, 계급갈등 등을 담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요리예능에도 '요리 계급 전쟁'이 부제로 붙으며, 흑수저와 백수저 셰프의 대결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국대학교 윤재웅 총장이 지난 11일(현지 시각) 미국 예일대학교 스털링 기념 도서관에서 실시한 한류 특강은 큰 관심을 모았다.

윤 총장은 한류를 "오늘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류가 단순히 경제적 경쟁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과 문화와 예술이 결합된 민족의 독특한 에너지에서 유래하는 문화콘텐츠"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한류의 글로벌 확산을 ‘한국 문화 콘텐츠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향유되는 현상’으로 설명하며, 한류의 핵심 경쟁력으로 ▲슬픔과 상처에 대한 공감 ▲꿈과 희망을 향한 갈망 ▲생명에 대한 지혜 ▲실생활에 유용한 가치 ▲작고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 ▲감각적 아름다움의 향유 등을 강조했다.

영화 '전, 란'에서 몸종 ‘천영’을 연기한 배우 강동원.

▶권력 관계와 신분제가 흔들리는 16~17세기 조선의 현대적 의미와 해석

'전,란'은 슬픔과 상처에 대한 공감이라는 측면에서 한류콘텐츠로서의 효용가치를 지닐 수 있다. 계급과 신분에 대해 말하는 '전,란'은 임진왜란기 선조때의 정치와 전쟁, 사회상을 말하고 있지만, 캐릭터도 가공하는 등 자유롭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촬영도 검술 신 등을 보면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영화는 '대동계(大同契)를 만든 정려립이 죽고, 아들 옥남이 효수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천하는 주인이 따로 없다. 양반과 천민이 함께 하고, 임금과 백성이 대동하다는 집단이다. 엄격한 신분제를 고수하는 조선의 성리학과는 정면으로 위배된다.

정려립 난의 진압은 당파싸움용으로 이용됐다. 서인이 동인들을 실각시키는 용도였다. 정려립과 연루된 1000여명 동인을 대숙청시킨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연결된다. 칼자루를 쥔 서인 정철은 무자비하게 동인을 죽여 선조의 마음에 든 것 같지만 결국 선조의 후계자로 신성군을 추천하지 않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바람에 선조의 노여움을 사 귀양길에 오른다.

하지만 백성들이 "우리들 고혈을 빨아먹을 때는 언제고, 가장 먼저 줄행랑이냐"고 몽진하는 선조일행에게 퍼붓는 걸 보면 공고한 신분제 사회도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양반집 자제 종려가 어린 시절 검술 훈련을 하다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몸종인 천영이 회초리로 맞는, 너무도 불합리한 장면은 현대에도 또 다른 얼굴로 오버랩된다. 천영이 종려 대신 무과 시험을 대리로 봐주면 면천시켜준다고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전장에서 의병과 선조 호위무관이라는 '적'으로 만났다.

영화 '전, 란'에서 옹졸한 임금 선조를 연기한 차승원.

선조를 연기한 차승원은 아주 고약한 맛과 위엄있는 맛의 경계에서 연기했다고 했다. 의병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의병대장 김자령(진선규)이 힘들게 잡은 고시니 유키나가의 선봉장인 겐신(정성일)에게 남은 의병들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는 선조에게 위엄이 느껴질 수 없다.

대동계가 망하고 다시 규합된 의병들이 조직 이름을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범동계(凡同契)로 짓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남은 희망을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전에서 무예를 익힌 '범동'은 몇안되는 여성의병으로 농기구인 도리깨를 타격무기로 잘 쓰는 김신록이 연기한 배역 이름이기도 하다.

통역병이 죽기 직전까지 일본장군 통역을 하는 장면은 웃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청의검신' 천영과 종려, 겐신 3인의 최후 군무검술액션의 영상미는 볼만하다.

영화 '전. 란'에서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선조의 호위무사가 되는 ‘종려’를 연기한 배우 박정민.

'전.란'은 전쟁으로 황폐해져 시체를 뜯어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심이 흉흉한데, 왕은 이왕 궁궐을 다시 지으려면 6천칸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소리친다. 의병장으로 공적을 세운 양반 출신의 김자령(진선규)은 선조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당해 죽임을 당한다. 의병대에 참가하며 "전란에서 살아난 자는 있어도 역모(반란)에서 살아난 자는 없네"라고 말한 박식한 '책사 어른' 상문(전배수)의 말과 "왜놈과 싸우다 죽건 왕에게 덤비다 죽건 마찬가지"라는 천영(강동원)의 말에서 활발하지 않은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이 읽히는 것은 왜일까?

정치란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 행위인데, 이렇게 정치하면 권력이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신분제와 권력관계가 크게 흔들린다. 전세계에서 누가 봐도 감정이입할 수 있는 '슬픔과 상처에 대한 공감' 스토리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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