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튀르키예 헤리티지 여행⑪
한국인 일행 버선발로 반기는 튀르키예인들
로마 양식, 동양적 목조 양식 모두 활용 눈길
[헤럴드경제(튀르키예 시브리히사르=함영훈 기자] 튀르키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하이포스타일 목조 사원들’ 5곳은 모두 800년전 무렵 셀주크투르크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건축양식은 로마를 입히고, 동북아시아의 목조 양식도 활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시브리히사르 울루 사원에서의 기도. |
소박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이슬람 사람들은 기독교도들과 공생하며 존중한다, 히잡 쓴 무슬림도 이 교회를 찾았다. |
11~12세기 동방으로부터 온 셀주크 투르크는 소아시아의 새 지배자가 된 이후, 이전까지 지배층이던 로마문화에 적응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기존 소아시아 또는 주변국 왕족, 귀족들의 화친 요청에 대해, ‘사돈맺기’, ‘결혼하기’로 화답한다. 그래서 당시 셀주크 왕실과 귀족, 총각군사들은 로마, 그리스 및 그 제후국 등과 활발하게 사돈을 맺거나 결혼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중부-서부 유럽이 EU 단일체제가 된 데에는 리더 그룹들 간 사돈맺기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을 상대로 한 전쟁범죄나 신대륙 발견 운운하면서 인종개조를 도모했던 침략세력의 행태와는 정반대이다.
투르크(돌궐)의 경우, 튀르키예에 정착한 이후 후손들의 모습이 급격히 서구화되어, 기존 토착세력들의 모습으로 금새 바뀌고, 오히려 지배세력의 얼굴에서, 원래 출발지였던 동북아시아 느낌이 사라진다.
금새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튀르키예 사람들 |
▶1천년 융합, 화합 정책= 최근 튀르키예에선 “우리의 뿌리를 고조선·고구려(=고리=코리=고려=코리아, 부리얏=부여) 이웃이자 형제 같았던 돌궐(돌궐+선비+유연+흉노 및 몽골 일부)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즉, 자신들의 외할머니는 원래 이곳에서 수천년 살아오셨던 지중해, 소아시아, 로마인들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매우 일리 있는 얘기이다. 정복세력의 혈족 중심으로만 문화인류학,유전학을 연구하면 큰 문제가 생기고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지금 동북아시아 민족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튀르키예 사람들의 대부분은 고구려의 후예인 ‘형제국’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유지하되, 자신들의 원류적 아이덴티티를 ‘1만년전부터 여기에 살던 분들’로 삼으려는 사람이 대세가 되고 있다.
서기 1200년 무렵 당시, 자신들의 할아버지는 동북아시아 출신이 일부 포함되었겠지만, 할머니는 1만2000년(괴베클리테페, 샨르우르파 유적 기준) 부터 이곳에 사셨다는 것. 할아버지와 할머니 입장이 바뀐 경우도 당연히 존재한다. 할아버지가 1만2000년전부 살아오셨고, 할머니는 800~900년전 동쪽에서 이주해온 분들일수도 있다.
지금의 튀르키예인들은 히타이트, 프리기아, 리디아의 후예이자, 로마, 돌궐, 지중해 다양한 주역들의 후예들이다. 사진은 시브리히사르 내 프리기아 정착지. |
매우 큰 인식의 전환이다. 지금까지는 “소아시아는 11세기 이후에야 튀르키예이고 그 전엔 히타이트, 프리기아, 앗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로마 것”이라고 분리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는데, 이 잘못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1만년 이상 우리 선조들이 가꾸어오신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부계이든 모계이든 말이다.
케말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이 100년전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9000년전 차탈회위크 유적 등을 “원래 우리 것”으로 여겨, 복원·보존, 대국민 공유를 시도한 것이 발상 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
전체 국민 수에 비해 소수였을 투르크 이주세력의 대세 장악 이후 상황과 관련해, 튀르키예 역사가들도, 지금의 튀르키예 국민들도 “투르크는 이주하거나 정복한 곳에서 현지의 모든 것을 존중해, 동화되거나 자연스러운 문화접변을 도모했지, 현지 기존 문명과 문화, 관습, 종교를 훼손하거나 말살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
▶신라,고려,로마가 다 보이는 목조건축= 이는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5개의 튀르키예 목조사원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동양과 서양의 특성을 모두 취했다.
5곳 중 시브리히사르 울르 모스크를 최고로 친다. 최대이고, 최고 걸작이며, 센세이션도 입었다. 내부는 얼핏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느낌을 준다.
동서양 건축기법이 모두 반영된 시브리히사르 목조 사원 울루 자미(모스크) |
못질을 거의 하지 않은 나무 이음새, 동북아 형 다포식 기술도 아는 목조 접합공법, 동양식 팔작이 아닌 평평한 나무 천장, 지붕을 지탱하는 내부 기둥(로마식 하이포 스타일), 기둥과 보를 편한기 엮어주는 로마식 완충구조물, 동양식 나무 대들보, 자른 나무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드는 쿤데카리(kündekari) 기법 등 동서양 건축양식이 혼재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사원은 베이셰히르 에슈레풀루(Beyşehir Eşrefoğlu Mosque), 시브리히사르 울루(Sivrihisar Ulu Mosque), 카사바쾨이 마흐무트 베이(Kasabaköy Mahmut Bey Mosque), 아히 세레페딘(Ahi Şerefeddin Mosque), 아피온카라히사르 울루 모스크(Afyonkarahisar Ulu Mosque) 등 앙카라와 아피온에도 있다.
목조 사원 내부엔 나무 기둥 옆에 거미줄이 쳐지지 않도록 거미 퇴치를 위해 타조알 모양의 주머니를 달아두었다. 거미가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브리히사르에서 시브리히사르 예법을 따르며 경건한 태도로 목조성당 내부를 관람을 하고 있는 한국인 탐방객 |
반대로 일부러 거미줄을 두기도 하는데, 비신도가 거미줄을 보고 돌아가게끔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특히, 금요일 예배전 거미줄을 치우는 것은 금기한다.
▶국난극복이 취미, 한국민 닮은 시브리히사르 주민들= 시브리히사르 울루에 사람이 많이 찾는데에는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라는 점 외에, 이 울루 사원을 배경으로 한 가족 코미디 로맨스 드라마 ‘괴뉠다으(Gönül Dağı)’의 영향도 있다.
2020년 10월 17일에 TRT1에서 방송을 시작한 이후 아직도 방영되고 있는 이 드라마는 가족, 코미디, 로맨스 장르이며, 아나톨리아 사람들의 삶을 다룬 대초원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초대박을 내고 있다.
게델마을에 사는 세 명의 사촌이 호기심 어린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커서도 계속 발명품을 만들고, 마침내 비행기를 개발하는 과정의 애환과 명랑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극중에도 나오는 비행기는 시브리히사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헤리티지이기도 하다. 이곳엔 비행센터와 비행기기념물이 있다.
시브리히사르를 지켜왔던 뾰족한 산봉우리 요새. 마을이름은 뾰족하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
그리스와의 독립 전쟁 동안, 튀르키예는 승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시브리히사르가 다시 그리스에 함락돼 충격에 빠진다. 맹렬한 반격 끝에 38일만에 수복한뒤 주민들은 무기부족 때문에 다 이긴 전쟁을 놓칠 뻔 했다면서 모금을 시작했다. 이미 전쟁에 승리해 튀르키예 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였지만, 주민들은 군에 비행기를 사주었다. 당시 최신식이던 프랑스제 폭격기였다. 군은 물론 온국민, 이웃나라들도 감동했다고 한다.
▶인구 2만이지만 소아시아 십자로= 이 작은 소도시에 가장 크고 인기있는 신앙의 전당이 들어서고, 국방에 대한 주민들의 책임감이 강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이곳은 주요 도시로 가는 십자로이고, 당연히 정복군주 길이 있었다. 현지인들은 ‘왕의 도로’라 부르는데 특정 왕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미다스의 왕으로 유명한 프리기아인들의 정착지였던 곳은 조각공원으로 변신했다. |
청동기 시대부터 인구가 많은 거점도시였고, 철기 시대엔 프리기아 왕국의 핵심 도시 중 하나였다. 시브리히사르 수호산인 칠산 자락 경사면은 프리기아 정착지였고, 지금은 스토리를 담은 조각공원이 되었다.
프리기아 미다스왕가(시대적으로 미다스의 여러 세대 후손으로 추정됨)가 세운 페시누스(발리히사르) 신전이 시브리히사르 근교에 있다. 프리기아와 로마양식이 혼재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마제국 성립이후 하루속히 로마양식을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이 시점은 '황금손' 미다스 1세왕보다 600-700년 이후이 일이다. 프리기아를 괴롭혔던 페르시아 왕 페시누스 역시 시브리히사르 왕의 도로를 통과했다.
인구 2만의 시브리히사르는 많은 것을 가졌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3개 대륙의 새들이 머무는 발르크다무 조류 천국공원(Balıkdamı)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시브리히사르 마을 |
시브리히사르 러그박물관에 소장된 이 러그(양탄자와 비슷한 걸게)는 문양에 샛길 정보와 안전하게 나오는 정보를 담아, 포위된 아군을 탈출시켰다고 한다. |
또 눈에 띄는 점은 무슬림이 1000년간 지배하고도 아나톨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기독교회 아르메니아 교회(Armenian Church Surp Yerortuyun)의 보존에 힘쓰고, 평화롭게 공생한다는 점이다. 이슬람교도들도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시브리히라스 도시 인구의 감소 등으로 신도는 많이 줄었지만 단촐하고 심플한 디자인이 오늘날 화려하게 꾸미는 몇몇 기독교 디자인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이밖에 이 마을엔 워낙 유명한 호자(헤럴드경제 11월9일자 ‘아나톨리아의 꽃’ 1편 참조)의 족적, 오래된 목욕탕, 구시가지 등이 있다.
▶명랑 앞치마 펄럭이듯, 양탄자 무늬로 포위 탈출= 시브리히사르는 진주 귀걸이, 포켓 스퀘어, 5개의 굴뚝이 있는 양탄자 등 스토리를 품은 지혜로운 공예품으로도 유명하다.
시브리히사르 중심가 |
양탄자 자수로 포위된 군인들을 탈출시킨 얘기는 시브리히사르 부녀자들의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문득, 풍향과 적의 방향 변화를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해군에게 알려주던 명량 대첩 여인의 치맛바람 장면이 떠오른다.
시브리히사르는 튀르키예 내에서도 소문난 ‘예쁜 도시’라서 MZ세대들이 많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형제국’인 한국인들을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좋아해줄 지는 몰랐다.
20대 베이다 씨는 한국인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4050 남녀로 구성된 한국인 탐방단 일행을 계속 에스코트해주었다. 잔치를 마치고 나온 주민들은 한국인들과 금새 어울려 사진을 찍었다.
코라다으씨 일가족은 한국인들을 무척 반겼다. |
한국말을 독학한 대학생인 제이넵 이크라, 니할 춤라, 두 코라다으 가정의 자매와 부모는 멀리서 한국말을 알아듣더니 다가와 말을 붙여왔다.
자매는 한국 노래를 좋아하면서 시작한 한국 공부가 이젠 모든 부문에 대한 친근감으로 커졌다는 얘기도 했다. 부모들도 자매의 ‘한국 배우기’ 행보를 흐뭇하게 지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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