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을 주 52시간 근무 대상에서 제외하고, 반도체 기업에 직접 정부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반도체 특별법안’을 당론으로 발의하고 이번 회기 국회 통과를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일본·대만 등 한국과 경쟁하는 주요국들이 일찌감치 도입한 제도를 이제야 시행하려 한다니 만시지탄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던 우리 기업들에 대등하게 경쟁할 토대를 만드는 일인만큼 입법 속도를 높여야 한다.
법안에는 “기업과 노조 등 당사자 간에 합의를 하면 R&D 인력은 주 52시간 근로에 예외를 둔다”는 항목이 포함돼 있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국내 반도체 업계가 최근 정부와 정치권에 도입을 요구한 ‘한국형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White Collar Exemption)’가 시행될 수 있다.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는 미국이 1938년 도입한 것으로, 고위 관리직과 전문직, 고소득자는 근로 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한다. 일본도 2018년 비슷한 제도를 도입했고, 주 40시간 근무가 원칙인 대만도 노사 합의하에 일일 근무를 8~12시간 늘릴 수 있다.
‘졸면 죽는’ 디지털 기술 혁명기에 주 52시간제를 획일적으로 적용하다간 AI(인공지능)와 반도체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데이터센터의 핵심 부품인 AI 가속기는 미국의 엔비디아가 90%를 독점하고, 첨단 반도체 제조는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1위인 대만 TSMC가 압도적 경쟁력으로 우리와 격차를 벌리고 있다. 범용 반도체는 중국의 추격이 매섭다. 이런 상황에서 엔비디아, TSMC 연구원들이 더 앞서가려 밤을 지새는 동안 우리 연구원들은 토론 끝에 아이디어가 떠오를 만하면 퇴근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반도체 전쟁에서 낙오한 인텔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배터리, 바이오, 소형원전(SMR) 등 핵심 분야의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52시간제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
법안에는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직접 보조금 지원 항목도 포함돼 있는데 이 또한 중요한 과제다. 현재 우리는 반도체 기업들에 정책금융(대출)을 지원하고 있고 국가 전략기술 시설 투자에 대기업·중견기업은 15%, 중소기업은 25%의 세액공제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 특혜 논란 때문에 보조금 지급은 없다.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유럽·인도까지 공장 건설 비용의 최대 70%까지 지원하는 파격적인 보조금을 앞세워 반도체 투자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여야가 지난달말 ‘민생공통공약 추진협의회’를 출범시킨 만큼 직접 보조금에 미온적인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제1호 성과물로 내놓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