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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 ‘주피터스 문’ 무중력 상태의 난민, 그 아릿한 판타지
뉴스| 2018-08-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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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피터스 문' 스틸컷 (사진=엣나인필름)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김동민 기자] 지구상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난민’일 것이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았거나 어떤 이유로 국가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러한 난민들에게 자신을 지켜줄 보루는 더 이상 없고, 이런 그들이 어디든 가려고 해도 좀처럼 환영받지는 못한다.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오는 경계심에서 어쩌면 밥그릇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많은 경우 이들은 자신을 거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모두가 살아가는 땅 위에 발 딛지 못한 채 공중에 떠서 허둥댄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영화 ‘주피터스 문’은 이러한 난민의 처지를 SF 장르의 화법으로 기묘하고도 아릿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헝가리 난민 캠프에서 뒷돈을 받고 밀입국을 돕는 부패한 의사 스턴(메랍 니니트쩨)과 시리아 난민 소년 아리안(솜버 예거)이 그 주인공. 중력을 거스르는 능력을 지닌 아리안이 밀입국 과정에서 국경수비대에 쫓기는 와중 아버지와 헤어지고, 아리안의 초능력을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스턴이 몰래 그를 빼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큰 줄기다. 스턴과 아리안의 동행과 이를 쫓는 당국 사이의 추격전은 종과 횡으로 얽힌 서사를 환상적이고도 무겁게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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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피터스 문' 스틸컷 (사진=엣나인필름)



‘주피터스 문’의 가장 매력적인 소재라면 역시 아리안의 초능력이다. 주요 장면에서 천천히 공중에 떠오르는 아리안의 모습은 놀랍다 못해 경이롭게까지 연출된다. 영화 초반부 총에 맞아 쓰러진 아리안이 돌연 수풀 위로 떠오르는 장면은 예기치 못한 신선한 충격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중반부 스턴과 함께 찾은 환자의 집에서 보여지는 그의 초능력 역시 시각적 임팩트가 상당하다. 공중에 떠오른 아리안을 중심으로 상하좌우로 중력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난장판이 되는 집 내부 신은 영화의 백미다.

다만 영화는 아리안의 초능력을 ‘공중부양’이 아닌 ‘공중부유’ 쯤으로 다루는 데서 그친다. 그는 단지 공중에 떠오를 뿐,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대단한 액션을 보여주거나 누군가를 구하는 식의 초인적 면모를 보이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중력을 거슬러 떠오르는 행위조차 자유자재라기 보단 어떠한 자연 현상에 의한 수동적 운동으로 비춰질 정도다. 그의 초능력에서 특별한 ‘힘’ 대신 '난민으로서의 무력감'이 먼저 엿보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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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피터스 문' 스틸컷 (사진=엣나인필름)



아리안의 조력자인 동시에 ‘고용주’ 격인 스턴의 서사는 또 다른 결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자녀를 잃은 상실감에 빠져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에게 난민 문제는 그제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 캠프를 찾아 환자들을 만날 때면 몰래 물건을 건네주며 심부름 값을 받기도 하고, 뒷돈 몇 푼에 멀쩡한 환자를 캠프 밖 일반 병원으로 보내 밀입국을 돕기 일쑤다. 이런 그에게 있어 아리안은 이용하기 쉬운 서커스단 동물이나 다를 바 없고, 중력을 거스르는 기적 역시 외줄타기 정도의 묘기쯤인 듯하다.

이러한 스턴의 이기적 태도는 흔히 난민에게 던져지는 “우리가 너희들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당연하지만 비인간적 질문과 절묘하게 부딪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가 널 돌볼 테니 나를 위해 일해 달라”는 스턴의 제안 속에 아리안이 난민이란 사실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턴과 아리안이 영화 말미 일련의 사건들에 연루된 끝에 ‘국가’란 이름의 폭력에 노출되는 전개는 이같은 메시지에 방점을 찍는다. 제주도 난민을 바라보는 국내 일부 혐오 여론이 줄곧 이 영화에 겹쳐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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