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미국 청년의 훌리건 도전기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뉴스| 2014-12-04 15:08
훌리건 난동의 세계화

꼭 축구팬이 아니어도 ‘훌리건’이라는 말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훌리건을 정확한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곤란하네요. ‘극렬 축구팬’으로 번역해야 할까요? 그러나 열정적인 축구팬의 대부분은 비록 경기 중에 욕설은 할지언정 남을 폭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깡패 축구팬’은 어떨까요? 그러나 단순히 ‘깡패’라는 말로 나름의 조직과 체계를 갖춰 행동하는 훌리건의 습성을 설명하기 벅찹니다. ‘조폭 축구팬’?

근접한듯하지만 훌리건들은 조폭들처럼 경제적, 정치적 이권에 기생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조폭처럼 조직화되어 있지만 자신들의 축구팀을 위하는 나름의 가치관을 가진 채 그것을 깡패처럼 폭력으로 표출하는 훌리건. 이 복잡하고도 오묘한 의미를 담아낼 만한 우리말이 딱히 떠오르진 않네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냥 ‘훌리건’이라고 쓰는 것 아닐까요?

훌리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습니다. 1800년대 말, 영국 거리의 유명한 불량배 패거리였던 ‘hooly’s gang’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는 비슷한 시기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깡패인 ‘패트릭 훌리한’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튼 훌리건 난동은 근대 축구가 탄생하던 19세기부터 있었습니다.

훌리건 난동이 사회 문제로까지 커진 것은 1960년대 영국 보수당 정권 시절입니다. 이름부터가 보수적인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던 시기죠. 당시 일자리가 줄어들고 복지도 축소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울분을 축구장에서 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축구 서포터들의 응원이 다른 종목보다 유난히 격렬하고 전투적인 것은 이 영향이 아닐까요?

축구장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서 훌리건 난동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 시작합니다. 39명이 죽은 1985년의 헤이젤 참사(The Heysel Stadium disaster), 96명이 죽은 1989년의 힐스보로 참사 등등. 모두가 즐거워지기 위해서 하고, 또 보는 축구일진데 어째서 생명까지 바쳐야 하는 것일까요? 이 참사를 계기로 잉글랜드의 축구장 안전은 강화되고 훌리건에 대한 통제는 더욱 심해집니다.

오늘날에도 훌리건 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훌리건의 본고장인 잉글랜드를 넘어서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죠. 잉글랜드 축구팬이 터키에 원정을 갔다가 칼에 찔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흥분한 훌리건이 광장에 모인 상대방 축구팬들을 향해 차로 돌진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축구장 난동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심한 경우 경찰력이 투입되기도 합니다. 경기장 치안 대책은 강화되는 추세인데 대체 왜 훌리건 난동은 계속 일어나는 걸까요?

이미지중앙

영화 훌리건즈의 포스터.

세상에 상처 입은 미국 청년의 영국 훌리건 되기


영화는 맷 버크너(Matt Buckner) 라는 미국인 대학생이 영국으로 시집간 누나를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맷은 하버드 대학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던 엘리트였죠. 하지만 같은 기숙사를 쓰던 룸메이트가 숨긴 마약 때문에 누명을 쓰고 퇴학을 당합니다. 유력한 정치인 아버지를 둔 룸메이트는 풀려나고 맷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증거도 없고 설사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힘 있는 자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에서 맷의 누명이 과연 벗겨질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런던에 살던 누나를 찾아온 맷은 그 곳에서 매형의 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피트 던햄(Pete Dunham)이죠. 그런데 피트의 분위기가 어쩐지 남다릅니다. 한 눈에 봐도 불량배 같은 피트. 하지만 이러저러해서 둘은 함께 축구를 보러 가게 됩니다. 축구를 ‘사커(soccer)’라고 말하는 미국인 맷에게 영국인 피트는 “그 놈의 사커, 사커 소리 좀 집어치워! 사커가 아니라 풋볼(football)이라고!!” 소리 지릅니다. 미식축구를 풋볼이라고 말하는 미국과 축구를 풋볼이라고 말하는 양국의 미묘한 문화 차이가 드러난 것이지요. 어쩌면 과거 대영제국의 향수 속에서 현재의 초강대국 미국을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불편한 감정일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 기묘한 콤비가 탄생합니다. 혈연관계도 아니지만 얼떨결에 가족이 된 사돈. 최고의 엘리트와 시시껄렁한 불량배. 그리고 미국인과 영국인. 참 미묘한 커플이죠?

맷은 피트를 따라 축구장으로 가기 전 피트의 친구들이 모여 있다는 펍(Pub)에 들어갑니다. 그 곳에서 경기 전 신나게 맥주를 퍼마시며 온갖 욕설을 하고 축구 응원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만나지요. 실제로 영국에서는 축구장 내에서의 주류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고 합니다. 훌리건 난동으로 인한 조치지요. 그러자 극성 축구팬들은 아예 경기장 앞의 술집에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경기장으로 향하곤 한답니다.

맷이 술집에서 만난 한 눈에 봐도 불량스러운 스킨헤드와 가죽 잠바의 양아치들. 알고 보니 그들은 런던의 축구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West Ham Utd. F.C.)의 극렬 서포터인 GSE(Green Street Elite)입니다. 피트는 GSE의 두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펍에서 나와 두 손을 크게 하늘로 벌리고 목청을 높이면서 비눗방울을 날리고 어쩌고 하는 괴상한 응원가를 부릅니다. GSE, 그리고 그들을 희한하게 쳐다보는 맷은 웨스트햄의 경기가 열리는 업튼 파크(Upton Park)로 향합니다.

단순한 축구 경기 관람이라고 생각했던 맷은 GSE 친구들이 마치 쫓기는 범죄자마냥 CCTV를 피해 얼굴을 가리면서 경기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느낍니다. 알고 보니 GSE는 극렬 서포터를 넘어선 훌리건 집단이었던 것이지요. GSE는 경기가 끝나고 상대팀 훌리건들과 뒷골목에서 크게 패싸움을 벌입니다. 피가 난무하고 벽돌이 날아다니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고, 얼떨결에 맷은 난투극에 휘말려 GSE와 같이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GSE 멤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맷은 이후로 피트와 그의 훌리건 조직 GSE를 따라다니며 온갖 난투극에 참여합니다. 나중에는 그 비눗방울 어쩌고 하는 응원가도 제법 폼 나게 부르는 그럴싸한 훌리건이 되죠. 이역만리 잉글랜드에서 훌리건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듯한 미국인 맷. 하지만 비극은 시작됩니다. 웨스트햄과 철전지 원수인 이웃 동네 축구팀 밀월(Millwall F.C.)의 훌리건들이 습격을 해 온 것이지요.

게다가 맷이 언론학을 전공한다는 것을 안 GSE 멤버들은 맷을 스파이 취급합니다. 범죄자 조직에 가까운 GSE는 훌리건을 폭로하는 기자들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상황은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마침내 웨스트햄과 밀월의 최후의 결투가 벌어집니다. 과연 맷과 피트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요?

I’m forever blowing bubbles 난 영원히 비눗방울을 날릴 거야
Pretty bubbles in the air 아름다운 비눗방울들이 하늘을 날지
They fly so high 아주 높이 날아
They reach the sky 비눗방울들이 하늘에 닿는다

And like my dreams 사라져버린 나의 꿈처럼
They fade and die 비눗방울들이 터져 없어져버리네
Fortune’s always hiding 희망은 항상 숨어있고
I’ve looked everywhere 난 어디든 찾아 헤매지

I’m forever blowing bubbles 난 영원히 비눗방울을 날릴 거야
Pretty bubbles in the air 아름다운 비눗방울들이 하늘을 날지
United! United! 유나이티드! 유나이티드!

(실제로도 이 노래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경기장에서도 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고 하네요.)

이미지중앙
왜 훌리건 난동은 계속 될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죠. 왜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훌리건 난동은 계속될까요? 물론 이 영화에서 그 원인을 모두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해답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훌리건들은 극성 축구팬이라기보다 편을 가르고 희생양을 찾아다니는 사회 불만 세력에 가깝다.

살면서 화가 나고 열은 받는데 그 울분을 못 푸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화가 난 대상이 힘 있는 존재일 때는 나중의 불이익이 걱정 되어 그냥 참고 넘어가곤 하죠. 아니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이 꼬여서 누구를 탓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불행이 생겼는지도 확실치 않아서 속으로 삭혀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거나 애꿎은 대상에 화풀이를 하거나, 아니면 허공에 대고 “에이 씨!!!” 하고 큰 소리 한 번 지르고 넘어가 버립니다. 불만을 풀 데가 마땅치 않은 것이지요.

축구는 이런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요즘은 가족 관중들이 많아지고 축구장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욕설과 고성은 묵인되고 있죠. 세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경기장에서 푸는 겁니다. 사실 적절한 수준에서만 통제된다면 이런 식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법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언제나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가벼운 욕설을 넘어서 물리적인 폭력과 지나친 고성을 지른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축구는 사회에 심한 불만을 갖고 있고, 그 불만을 풀 희생양을 찾는 무리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곤 합니다. 독일의 나치스가 유태인을 희생양 삼고,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우리 동포들을 희생양 삼았듯이 말입니다. 물론 축구 사랑의 정도가 심해서 훌리건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훌리건스>에서 축구장은 단 한 번 나올 뿐입니다. 대부분은 그냥 뒷골목에서 패싸움을 하는 장면뿐이지요. 영화에 나오는 훌리건들은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 이후 상대팀 훌리건들과의 싸움에만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훌리건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요. 그래도 이 영화가 영국의 훌리건들을 충실히 재현했다고 가정할 때, 훌리건들은 극성 축구팬이라기보다는 축구를 빌미로 편을 가르고 희생양을 찾아다니는 사회 불만 세력에 더 가까움을 알 수 있습니다.

- 군중 심리에 묻혀 일탈 행동을 즐길 수 있다.

이 영화는 피가 튀고 벽돌이 날아다니는 난동에 대해서 ‘옳다’ 혹은 ‘잘못되었다’와 같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지요. 물론 훌리건들도 자신들의 폭력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상대에 대한 증오심만 있을 뿐이죠. 지식인 중의 지식인인 하버드생 맷마저 이들 훌리건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려 다니며 폭력을 휘두를 정도입니다.

“집단의 도덕성은 각 개인들의 도덕성의 합보다 작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훌륭한 사람도 다 같이 있을 때에는 익명성에 숨어 나쁜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는 말입니다.

훌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이 축구장에 모입니다. 반대편에는 나의 적들이 있습니다. 집단 속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죄책감 없이 상대편을 공격합니다. 축구장이야말로 집단 난동이 벌어지기엔 기가 막힌 환경인 것이지요.

- ‘나의 팀’이라는 나름의 명분이 있다. 따라서 지속되고 또 재생산된다.

아무리 대규모의 난동이 벌어져도 그럴듯한 명분이 없으면 그냥 흐지부지되어 버리는 일이 흔합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교도소 폭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크지 않고 대개는 금방 진압됩니다. 단순한 처우 개선이나 자신의 탈옥만을 목적으로 하는 교도소 폭동은 오래 가거나 또 큰 파장을 낳기가 힘들지요.

훌리건이 단순한 불량배들의 난동으로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건 교도소 폭동과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훌리건들은 축구팀에 따라 나뉘고 어쨌든 자기 팀의 승리라는 표면적 명분이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고 불만을 쏟아내지만 ‘내 축구팀의 승리, 상대팀의 멸망’이라는 나름의 명분을 추구하기에 이들 훌리건 집단은 계속해서 살아남고 또 새로운 회원을 만들어내며 경기 때마다 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 선과 악, 군중 심리, 잘못된 명분. 마치 사이비 종교 같은 훌리건 집단

이처럼 훌리건 집단은 극단적인 내 팀 사랑이라는 잘못된 명분을 내세우며 군중 심리에 휘둘려 상대팀 서포터를 희생양삼아 폭력을 가하는 집단입니다. 잘못된 종교, 즉 사이비 종교와도 비슷합니다. 마치 인류가 문명화되고 교육수준이 높아져도 사이비 종교는 사라지지 않듯이 훌리건 난동도 쉽게 사라지기 힘든 성격이지요. 그리고 그런 훌리건들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 영화가 바로 <훌리건스>입니다.

주인공 맷은 누명을 썼지만 상대가 힘 있는 자이기에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불만을 축구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해소하죠. 그러면서 희망과 자기 팀이라는 명분이 담긴 응원가를 부릅니다. 그러나 맷은 훌리건 난동을 부리는 것만으로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누명을 벗습니다. 하지만 훌리건 생활이 아주 쓸모없었던 건 아니죠. 훌리건 생활을 하면서 키운 ‘깡’으로 누명을 벗으니까요. 이 영화도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현실에서 도망가 엄한 상대팀 훌리건들과 싸움박질 하면서 분을 풀지 말고, 차라리 그 용기로 너의 진짜 현실에 당당히 맞서라’고 말이죠.

덧붙여: 영화 속에 나오는 두 팀, 웨스트햄과 밀월은 실제로도 엄청나게 사이가 안 좋은 팀입니다. 1899년 첫 맞대결 이후 무려 120년간이나 사이가 안 좋죠. 원래 경쟁 관계에 있는 조선 회사 노동자들이 만든 팀이어서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네요. 가장 최근에 벌어진 두 팀 간의 경기는 2009년 8월 25일에 열렸습니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수많은 양 팀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서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을 했고, 경기장 안팎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져 수많은 팬들이 병원에 실려 갔으며 심지어는 칼에 찔린 사람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얼마나 난동이 심했는지 양 팀 선수와 감독들까지 나서 훌리건들을 설득했다고 할 정도네요. 두 팀 간의 경기는 ‘훌리건스 더비’라고 불릴 정도라니 말 다했죠.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