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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대기번호 9번에서 우승을 거머쥔 1991년 PGA 챔피언, 존 댈리
뉴스| 2018-03-21 05:39

이번 주 칼럼은 메이저 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우승 중 하나로 기록된 원조 장타자 존 댈리(John Daly, 1966~)의 신데렐라 스토리이다. 다섯 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한 댈리는 골프 스윙을 혼자서 배웠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골프 팀에서 활약했던 댈리는 거친 행동과 말투 때문에 ‘난폭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7년에 프로가 된 댈리는 1990년 Q스쿨을 12등으로 통과하여 25세에 1991년 PGA 투어의 루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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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PGA 챔피언십 우승컵을 들고 있는 존 댈리.


1991년 PGA 챔피언십 대기번호 9번


PGA 투어 첫 시즌 댈리는 23회 출전에 11회 컷 탈락을 기록 중이었다. 다만 상금순위 70위권이므로 다음해의 투어카드는 확보한 상태였다. 당연히 시즌 후반에 열리는 PGA 챔피언십에는 대기번호 9번을 받아 사실상 출전이 어렵게 됐다. 댈리의 캐디가 대회가 열리는 주의 월요일에 다른 선수의 백을 찾아 대회장소인 크룩드 스틱 골프클럽 근처를 떠돌았을 정도다.

1라운드 전날인 수요일 오후 5시쯤 댈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PGA 챔피언십의 담당자였는데 앞 순위의 대기자 들이 모두 출전자 명단에 들어갔거나, 출전을 포기해 현재 댈리가 대기번호 1번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당장 출전을 할 수 있다는 희소식은 아니지만, 그 다음으로 좋은 최고의 뉴스였다.

당시 댈리의 위치는 멤피스, 대회가 열리는 인디애나폴리스까지 약 730km이고, 차로 8시간 거리. 댈리는 즉시 골프장 근처의 호텔을 예약하고 호텔 정보를 PGA에 알린 후 멤피스를 출발했다. 여자친구가 운전하는 차의 뒷자리에 앉은 댈리는 줄곧 맥주를 마시며 반쯤 취한 상태로 새벽 2시경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진 댈리가 전화기의 메시지 불이 반짝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메시지는 부인의 출산 때문에 마지막으로 기권을 한 닉 프라이스의 자리에 댈리가 들어가며 티 타임은 오후 12시 58분이라고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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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프라이스의 캐디였던 제프 메들린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존 댈리.


전장 7,289야드

대회 장소인 크룩드 스틱 골프클럽은 7,289야드로 셋팅되었는데, PGA 챔피언십 사상 두 번째로 긴 코스였다. 피트 다이가 디자인을 변경했는데, 당시 최장타자였던 그렉 노먼과 라운드를 하며 검증하여 장타자가 절대로 넘기지 못할 거리에 벙커와 워터 해저드를 조성했으며 도그레그 홀에서는 지름길로 가지 못하도록 해저드의 거리를 맞췄고, 러프에 들어가면 대가를 치르도록 길게 길렀다. 대기자 중에서는 코스가 너무 길어서 포기한 선수도 있을 정도였다. 연습라운드를 끝낸 잭 니클라우스는 플레이 한 코스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늦잠을 자고 골프장에 도착한 존 댈리는 퍼팅연습을 해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코스이고 연습라운드도 못했으니 야디지북을 보며 홀의 모습을 상상해볼 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닉 프라이스의 캐디 제프 메들렌이 댈리의 백을 메게 된 것이었다. 프라이스의 기권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메들렌은 이미 프라이스와 연습라운드도 했고 야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이제 메들렌의 임무는 맹인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인도견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캐디가 선수의 거리를 전혀 몰라서 클럽 선택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루키의 장타

드디어 댈리의 티 오프 시간이 되었다. 동반 플레이어인 빌리 안드레이드와 밥 로어는 1번 아이언을 가지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오는 댈리를 흥미롭게 지켜 보았다. ‘코스가 젖어있어서 실제 길이보다 훨씬 더 길게 플레이 되는데 아이언 티샷을 한단 말인가?’ 세 번째로 티 샷을 한 댈리의 볼은 밥 로어의 드라이버 티샷을 캐리로 가뿐하게 넘어갔다. 선수들도 캐디들도 놀라움을 감추며 출발했다. 전반 9홀이 끝나기도 전에 벼락을 동반한 많은 소나기가 내리면서 플레이가 중단되었는데 플레이가 재개될 때의 코스는 선수들에게는 지옥처럼 길어졌다.

1라운드 결과 댈리는 69타를 쳐 선두에 2타 뒤진 공동 8위였다. 기자회견에 초대된 무명의 루키에게 관심을 갖는 기자는 별로 없었고, 당시의 스타였던 그렉 노먼, 닉 팔도, 이안 우스남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첫 라운드에 반짝 잘 치고 사라져가는 무명의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날, 댈리의 캐디 메들렌은 거리를 알려주고 채를 건넨 다음 “킬(Kill)!”이라고 외치기를 반복했다. 폭발적인 댈리의 장타에 점점 더 많은 갤러리가 모여 들었고, 그들은 댈리를 “롱 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67타를 친 댈리는 이제 1타 차 선두가 되었고, 컷 통과를 목표로 삼았던 댈리의 자신감은 점점 커져 갔다.

셋째 날에도 댈리의 작전은 변함이 없었다. 드라이버-숏 아이언, 드라이버-숏 아이언, 드라이버, 드라이버…. 댈리의 드라이브 샷은 백 스윙 때 헤드가 땅에 닿을 만큼 오버 스윙이 되었지만 정확한 타이밍으로 임팩트를 만들어냈고, 동반 플레이어와 비교해 30~50야드를 길게 치게 쳤다. 14번 홀은 물을 끼고 왼쪽으로 꺾어지는 도그레그 구조였는데, 꺾이는 코너를 공략하려면 캐리로 280야드를 보내야 했다. 댈리는 4일 내내 코너를 넘겨서 샌드웨지로 두 번째 샷을 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3번 아이언으로 어프로치 샷을 해야 했다. 3라운드에서 69타를 친 댈리는 이제 3타차 선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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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댈리의, 그 유명한 오버스윙.


마지막 라운드의 전략

마지막 라운드 1번 홀에는 구름 같은 갤러리가 댈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댈리는 드라이버 대신 1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했다. 게임 플랜이 수비적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보기로 나타나자 2번 홀에서 댈리는 다시 게임 플랜을 공격적으로 변경하여 드라이버를 잡기 시작했고, 그의 드라이브 샷은 끝까지 댈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12번 홀이 끝나고 13번 홀로 이동하는 사이에 댈리가 카메라에서 사라지더니 잠시 후 다시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큰 흰색 종이컵이 들려있었다. 중계 팀에서는 그 컵이 맥주가 아니냐고 농담을 했는데, 훗날 댈리는 첫 날부터 맥주를 마시며 플레이했다고 고백했다.

17번 홀에 도착했을 때 5타 차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홀에서 더블보기를 범하며 리드가 3타로 줄었다. 그리고 가장 어렵게 플레이되고 있는 18번 홀에 도착했다. 중계 해설가는 “오른쪽이 워터 해저드로 둘러 쌓인 이 마지막 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아이언 티샷을 하는 것이 확실하게 우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나 댈리의 선택은 드라이버였다. 3라운드까지 매일 드라이버로 페어웨이를 지켰고 2, 3라운드에서 버디를 했던 홀인데 마지막 라운드에 왜 드라이버를 못 치느냐는 자신감이 있었다.

댈리의 마지막 티샷은 페어웨이 왼쪽의 짧은 러프에 떨어졌고, 8번 아이언 어프로치 샷은 너무 쉬웠다. 69-67-69-71, 12언더파 276타로 3타차 우승이었다. 댈리의 드라이브 샷 평균거리는 303야드였다. 톰 카이트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선수들이 2번 아이언으로 어프로치 샷을 하는데 댈리는 8번 아이언이면 충분했다. 그의 우승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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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디 오픈을 제패한 존 댈리.


우승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승의 원동력은 드라이버였지만 숨은 공로는 퍼팅이었다. 동반했던 선수가 말했다. “댈리는 어린아이처럼 퍼팅을 했다. 댈리가 퍼팅한 볼은 시속 100마일의 속도로 홀에 들어갔다.” 이 말은 댈리가 퍼팅에 얼마나 큰 자신감을 가졌는지 증명한다.

캐디 제프 메들렌은 1992년 PGA 챔피언십에서 닉 프라이스의 캐디로 우승을 했는데, 선수를 바꿔서 메이저 타이틀을 방어해 낸 최초의 캐디가 되었다. 1997년 43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메들렌은 캐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0년 PGA 투어가 공식 통계자료를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 드라이버 평균거리 300야드를 넘긴 선수는 존 댈리가 처음이었고,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유일한 300야드 선수였다. 그가 장타자의 원조였던 것이다. 댈리의 스윙은 골프 역사의 어떤 스윙과도 달랐다.

댈리는 1995년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의 디 오픈에서 우승함으로써 1991년 PGA 챔피언십 우승이 우연이 아닌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 이후 알코올중독과 도박중독의 문제로 선수생활이 순탄치 않았고 현재는 챔피언스 투어에서 조용하게 활동하고 있다.

■ 존 댈리의 1991년 PGA 챔피언십 우승 영상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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