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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타타라타] 오광헌-무라카미의 ‘한일 탁구 브로맨스’
뉴스| 2020-01-28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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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감독의 책, '승리는 모두 미션에서 시작된다'의 표지. 맨 우측이 무라카미 감독이다.


일본 여자탁구의 대부, 무라카미 스토리


# 탁구를 소재로 한 일본의 리더십 책이 하나 있다. 2012년 11월에 나온 ‘승리는 전적으로 미션에서 시작된다(勝利はすべて、ミッションから始まる)’. 현 일본생명 여자탁구팀의 감독이자,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일본 여자탁구대표팀 사령탑을 역임한 무라카미 야스카즈(63 村上恭和) 씨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일본탁구의 올림픽 사상 첫 메달획득(여자단체 은메달) 과정을 리더십의 관점에서 담아냈다. 출간 당시 일본에서 나름 화제가 됐고, 지금까지 무라카미 감독은 기업이나 단체의 요청을 받아 특강을 나가곤 한다. 한 번에 50만 엔 정도 받는 강연료는 친분이 두터운 탁구인과 지인 들을 챙기는 데에 쏠쏠한 용돈이 된다는 후문이다. 참고로 무라카미 감독은 현재의 11점제를 주창해 ITTF가 받아들이도록 만든 탁구인으로 유명하다.

# 한국은 올림픽 탁구에서 양영자-현정화, 유남규, 유승민 등의 금메달을 포함해 숱한 메달을 획득했기에 무라카미 감독의 책에 대해 ‘은메달 하나 따고서는 웬 호들갑이냐?’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여자탁구는 한국이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2020년 1월 세계랭킹을 보면 톱10에 일본은 이토 미마(3위) 이시카와 카스미(9위) 2명이 있지만 한국은 귀화선수 전지희(포스코에너지)의 16위가 최고다. 그리고 2008년 이후 시작된 여자탁구에서 일본 급성장(이 사이 한국은 몰락)에는 바로 무라카미 감독이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에게 두 번이나 패하며 동메달 문턱에서 주저앉았던 일본 여자탁구는 당시 코치였던 무라카미를 감독으로 승격시키며 세계 2위를 목표로 했는데, 보란 듯이 성공한 것이다. 책을 보면 무라카미 감독은 ‘한국의 김경아, 박미영을 이기면 내 개인 돈으로 10만 엔씩 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60만 엔을 선수들에게 포상했다.

# 무라카미 감독은 일본 탁구계에서 대표적인 지한(知韓)파로 통한다. 한국 여자탁구를 따라잡기 위해 한국을 공부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음식, 한국문화를 좋아하게 됐다. 수시로 한국을 찾고, 오사카의 한국음식점을 즐겨 찾는다. 심지어 집 냉장고에 김치를 항상 준비해서 식사 때마다 먹을 정을 정도다. 일본 여자탁구에서는 이제 거물이 된 무라카미 감독은 지금도 왕성한 현역이다. 지난 18일 오사카에서 끝난 전일본선수권에서 주니어선수들의 경기에 벤치로 들어갔다. 또 이 대회에서 일본생명 소속의 하야타 히나가 이토 미마, 이시카와 카스미를 연파하며 처음으로 우승하는 것을 지켜봤다. 무라카미 감독은 “원래 한국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번 우승으로 하야타 선수가 세계선수권 국가대표가 돼 3월 부산(세계선수권 개최지)에 가게 돼 더욱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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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헌 감독(위)의 일본 여자주니어탁구대표팀 시절. 선수들은 오른쪽부터 히라노 미유, 이토 미나, 하야타 히나 '동갑내기 3인방'.


한국탁구의 일본통, 오광헌


# 보람할렐루야 탁구단의 오광헌 감독(50)은 이제는 탁구팬이라면 한두 번 이름을 들어본 지도자가 됐다. 이렇다 할 성적이 없는 무명선수였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지도자로 ‘슈쿠토쿠 대학 신화’를 만들었다. 수도권 2부팀을 일본 대학탁구 85년 역사에서 처음인 5연패(2000~2004년)를 달성했고, 일본탁구 여자주니어팀의 감독, 여자대표팀의 코치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종목을 망라해서 일본 최고의 지도자에게 주는 미즈노스포츠 멘토지도상(2016년)을 받기도 했다. 현재 일본 여자탁구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20세 3인방’ 이토 미마-히라노 미유-하야타 히나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 흥미롭게도 무라카미 감독의 '지한'과 오광헌 감독의 '일본 성공기(成功記)'는 서로 다른 나무가 합쳐져 한 나무로 자라는 연리목(連理木)이다. 2000년 이후 한국의 무명 지도자, 오광헌의 슈쿠토쿠 신화가 계속되자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았다. 무라카미 감독은 “슈쿠토쿠의 오 상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성실하고, 선수들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고, 전국대회에서 종종 만났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6명이나 국가대표를 배출한 슈쿠토쿠의 좋은 선수들을 일본생명이 스카우트하는 과정에서 하는 과정에서 둘은 친해졌다. 2003년과 2011년에는 슈쿠토쿠가 쟁쟁한 실업팀들을 제치고 전일본선수권(단체)에서 우승했는데 그때 무라카미 감독이 벤치를 본 일본생명도 슈쿠토쿠 돌풍에 희생양이 됐다. 오광헌 감독은 “2003년은 일본생명이 전무후무한 7연패에 도전했는데 우리 슈쿠토쿠에 당했다. 그때는 그렇게 친하지 않아서 미안할 게 없었는데 2013년은 인간적으로 죄송하기도 했다(웃음)”고 설명했다.

# 띠동갑이 넘는 나이차. 그럼에도 둘은 2005년 이후 서로의 인간적인 매력에 반해 둘도 없이 가까워졌다. 오광헌은 무라카미 감독의 깊은 안목과 지도철학이 좋았고, 무라카미는 오광헌의 성실함과 진실됨에 반했다. 2008년 말 오 감독은 무라카미 감독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직접 할 얘기가 있으니 오사카로 와라.”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후 국가대표 감독이 된 무라카미 오광헌을 국가대표 코치로 쓰고 싶어했다. “고맙지만 팀(슈쿠토쿠) 사정상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는 오 감독에게 무라카미 감독은 “가서 시라이 상(일본의 3대 승려 중 한 명으로 슈쿠토쿠대학의 거물)과 상의해보라”고 했다. 시라이 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락했고, 오광헌 감독은 슈쿠토쿠대학의 코치로 한국의 1년 후배를 데려온 후 대표팀에 합류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표팀의 한국인코치(오광헌)에 대해 일본탁구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무라카미 감독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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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탁구대표팀의 감독과 코치로 전 세계 국제대회를 다닌 무라카미 감독(왼쪽)과 오광헌 감독.


# “나도 연습에 일찍 나오는 편인데, 오 상은 정말 성실했다. 나보다 30분 먼저 나와 훈련장을 정리했다. 무엇을 시키든 최선을 다한다. 최고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다(무라카미)”. “무라카미 감독님은 2009년부터 매년 8번 이상 일본대표팀 코치자격으로 나를 해외에 내보내줬다. 견문을 넓혀야 한다며 말이다. 스페인 오픈에서는 일본선수가 한국의 박미영에게 게임(세트) 스코어 3-0으로 이기고 있을 때 내가 급히 벤치로 투입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3-4로 역전패를 당했다. 경기 후 무라카미 감독에게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이니까 ‘절대로 미안해하지 마라. 0-4로 질 경기를 네가 잘 가르쳐서 3게임이 따낸 것이다. 선수든 지도자든 경험이 중요하다’라고 격려해줬다. 탁구지도자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다(오광헌)”.

탁구 연리목의 교훈

# 13년의 나이차에 국적까지 다른 두 남자의 브로맨스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2013년 이토-히라노-하야타 동갑내기 3인방이 중학교로 올라오자 무라카미 감독은 오광헌에게 국가대표팀 코치와 함께 여자주니어감독을 겸직하도록 시켰다. 그래서 지금도 오광헌 감독이 이 세 명과 수시로 연락하는 사제지간의 연을 갖게 된 것이다. 어쨌든 무라카미-오광헌의 일본 여자탁구는 앞서 언급한 대로 2012년 런던 올림픽 은메달을 땄고,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수확했다. 오광헌의 주니어대표팀은 2016년 12월 중국을 꺾고 세계주니어 단체전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오광헌 감독은 2017년 보람할렐루야탁구단의 창단감독이 돼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무라카미의 품을 떠나게 됐다.

# 여전히 무라카미-오광헌 감독의 한일 탁구우정은 진행형이다. 지난해 몇 차례 무라카미 감독이 한국을 찾아 오 감독의 보람할렐루야탁구단을 응원했고, 오 감독은 최근 전일본선수권 현장을 찾아 무라카미 감독과 하야타의 우승을 지켜봤다. 무라카미는 선수선발, 행정 등에서 나쁜 관행이 많은 한국탁구계에 실망한 오광헌 감독에게 “그래도 최선을 다해라. 도저히 한국에서 못 견디겠다면 언제든 일본으로 와라. 오광헌을 위한 자리는 내가 마련해주겠다”고 늘 말하고 있다. 오광헌 감독은 “20년을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국적을 유지한 것은 내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한국사람이고, 끝내는 한국탁구를 위해 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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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끝난 전일본선수권대회 기간 중 오사카중앙체육관에서 포즈를 취한 오광헌 감독(왼쪽)과 무라카미 감독.


# 새해 초 한국 여자탁구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귀화에이스’로 불리는 전지희가 대표팀에서 유남규 감독의 말을 몰래 녹음해 대한탁구협회에 제출했고, 이에 유 감독은 자진사퇴하고 대한탁구협회는 전지희의 징계절차를 밟는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웃음거리가 됐다. 다행히 지난 26일 끝난 도쿄올림픽 퀄리파잉 대회에서 추교성 감독이 이끄는 한국여자대표팀은 천신만고 끝에 올림픽출전권을 따냈지만 여자탁구에서 선수와 지도자, 그리고 지도자들 간의 반목은 이미 도를 넘어섰다. 이 사이 일본 여자탁구는 안방(도쿄 올림픽)에서 중국을 꺾고 일본의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정하고 싶지만 지금 한국여자탁구는 일본의 라이벌 축에도 끼지도 못한다. 이미 일본은 귀화선수 정책을 펴다가 심각한 내홍을 겪었고, 이후 어린 선수들을 키워내는 데 주력해 지금의 부흥을 만들었다. 거꾸로 한국은 귀화선수들이 늘어나면서 국제경쟁력은 더 떨어지고, 이전투구만 심해졌다. 일본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탁구인들 간에 신뢰는 없고, 좋은 것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감독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리더는 신뢰관계를 만들어야 한다(信賴關係をつくる)', 그리고 '배우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學ぶ人間をを育てる)'고.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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