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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세 골프소설 19] 최초의 여성 골퍼 여왕 메리
뉴스| 2022-02-05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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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골퍼로 여겨지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엔젤라와 제임스는 그렇게 작별을 했다. 제임스의 마음은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짧은 기간 동안 확인해야 할 동선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가 스코틀랜드의 왕들이 거주했던 홀리루드 궁을 찾는 일이었다. 골프에 관한 제임스가 왕권 시절의 그들 말고도 메리 여왕의 모든 유품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세인트 앤드루스도 중요하지만 제임스가 그에 못지 않게 에딘버러를 찾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퀸 메리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는 에딘버러 시내로 들어가야 한다. 제임스는 5백 년 전에 골프를 사랑한 여인을 찾아 렌트카를 몰고 홀리루드 궁전으로 향했다.

시내 곳곳에 색이 바라다 못해 검은색으로 변한 채 천년 이상의 세월을 굳건하게 버텨오는 돌로 된 건물들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퀸 메리를 안 보고 어떻게 골프를 논할 수 있을까. 홀리루드 인근의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정부청사 건물 또한 벽돌 자체가 모두 검은색으로 천 년 세월을 대변한다.

여성 골프 역사의 증인, 세계 최초의 여성 골퍼로 기록된 여인, 5백 년 전 유럽 사교계의 디바, 남편 장례식 날 골프를 치다가 왕좌에서 쫒겨난 여왕, 18년 후 괘씸죄로 결국 단두대에 목이 잘려 길로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왕. 스코틀랜드의 모든 왕들을 모셔둔 그 홀리루드 궁전 속에 그녀도 잠들어 있다.

10유로를 내고 입장을 해도 절대 아깝지 않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만 제임스는 기필코 그녀의 방을 핸드폰에 남길 것이다. 어떻게 만난 그녀인데. 3층인지 4층인지 구분도 안될 정도로 너무도 많은 방과 왕들의 초상화와 집기들을 지나친다. 제임스 왕가의 여러 국왕들이 생전에 사용하던 침실이며 집기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

관광객들과 함께 여러 층을 지난 뒤 드디어 다가온 메리 여왕의 방. 가슴이 벌써 두근거린다. 모두들 메리의 방이 최종 목적임에는 관광객들의 표정으로 봐서도 확연히 알 수 있다. 40여 평 남짓한 그녀의 방에는 살아 생전에 쓰던 모든 것들이 망라되어 있다. 스코틀랜드는 그 녀의 모든 유품을 그대로 지켜왔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띄는 입구 왼쪽 벽에 걸린 대형 초상화는 메리의 위용을 대변해 준다. 액자만도 2미터가 넘어보인다. 180센티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메리의 큰 키는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갸름한 V라인의 얼굴, 갸냘픈 눈매가 5백 년 후의 그녀를 찾은 관람객들을 응시하고 있다.

앞쪽에 놓인 그녀의 장신구들은 여왕의 화려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입구 오른쪽에 쓰여진 현판에는 그녀의 모든 행적들이 가감없이 기록되어 있다. 남편을 살해하기 위해 정부를 고용한 내용,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고 골프를 치다 백성들의 원성을 산 내용, 그리고 잉글랜드로 망명 생활을 하다 처형당한 이야기들을 팩트대로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후세에 그녀의 모든 행적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해석은 후세의 몫이라는 뜻이다. 단지 그녀가 왜 남편을 폭탄으로 살해해야만 했을까, 왕권을 탐하고 자신의 정부를 죽여버린 남편, 복수와 함께 왕좌를 지키기 위해선 남편도 죽여야만 했던 처절함같은 동기부여는 왜 기록하지 않고 단지 사실만 써놨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해석은 그러나 각자의 몫일 것이다.

메리를 만난 오늘은 마치 오래전 사랑했던 첫 사랑의 흔적을 찾아 둘만이 즐겼던 장소를 찾아갔을 때, 거기 그녀가 있었다는 내용의 상투적인 소설의 한 대목처럼 제임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음 속에 5백 년 전의 메리를 흠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홀리루드 궁전과 그녀를 뒤로하고 공원을 가로질러 나오는 제임스의 머리 속엔 온통 메리의 초상화로 가득 차 있다.

그녀와의 만남이 이곳 홀리루드에서 마지막은 아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한 번 봐야한다. 그녀는 지금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잠들어 있다. 거기에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까지 봐야한다. 그래야 제임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메리의 이미지가 서서히 풀려진다.

골프 금지령을 해제한 제임스 4세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왕으로 제임스 5세가 등극했다. 아버지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골프를 배웠던 그는 다른 사람들과 경기를 해서 지지않을 정도로 실력파였다. 그러나 제임스 5세 역시 골프를 많이 즐기지 못한 채 30세의 짧은 생애를 마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잉글랜드와 벌인 플로덴 전투 이후 30년 만인 1542년 이번에는 아들인 제임스 5세에 의해 다시 한번 전쟁이 개시됐다. 숙적 잉글랜드와 다시 한 번 맞선 ‘솔웨이 모스의 전투’ 였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전사가 아니었다. 병약했던 몸을 이끌고 전투에 임했으나 잉글랜드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패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인근 성으로 피신한 그는 열병으로 2주 만에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들이 없었던 제임스 5세에게는 스코틀랜드 왕궁에서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되는 딸 메리가 있을 뿐이었다. 메리 여왕이 태어나던 12월8일은 스코틀랜드 특유의 우울한 겨울 날씨였다. 제임스 5세는 프랑스 기즈 지역의 마리와 노트르담 성당에서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갓난 아기 때 죽어서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

그토록 왕위 계승의 적통 아들을 바랐지만 전장으로 떠나면서 제임스 5세에게 들려온 마지막 소식은 불행히도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왕은 게일어로 된 짧은 유언을 남기고 결국 전장터에서 30세의 짧은 나이로 전사했다.

“한 여인(왕비)으로부터 이 왕좌가 왔으니, 이제 한 여인(메리)과 함께 끝나리라.” 메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태어난 지 6일 만에 왕좌에 올랐다. 국왕의 전사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메리에게 왕관을 씌워주면서 선택의 여지없이 여왕 체제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542년 12월14일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543년 이탈리아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하던 때였다. 그 이전까지 중세 사람들은 교회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하늘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던 시절이었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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