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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강사 이만기-이석록, 20여년간 ‘쌍둥이 인생’, 이제는 ‘각자의 길’로
뉴스종합| 2012-03-29 07:59
고교 교사→EBS 스타 강사 거쳐 나란히 사교육 업체로 이직

한 명은 공교육으로 복귀, 한 명은 사교육에 남은 ‘다른 인생’



2000년대 초. 학원을 다니지 않아, 방과 후 집에 와서 TV 앞에 상을 펴고 앉아 EBS(교육방송) 강의를 시청했다. 인터넷 강의가 대중화되기 전이었던 당시 EBS 강의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 학생들에겐 소중한 ‘사교육’이었다. 그래서인지 매일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던 강사들은 마치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듯 친밀하게 느껴졌다.

당시 아이돌 그룹 H.O.T.와 젝스키스가 가요계의 양대 산맥이었다면 EBS 언어영역 강의에서는 이만기(51ㆍ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와 이석록(54ㆍ한국외대 입학사정관실장)이었다. 당시 인천 문일여고, 서울 화곡고 국어교사였던 이들은 일선 학교 교사 출신 EBS 강사 중 ‘1호 스타강사’였다.

당시 학생들은 이들을 ‘만기쌤’ ‘석록쌤’이라고 불렀다. 강의 중간에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파격적인 시도와, 브라운관 너머에 있는 학생들에게 “졸지마”라고 말하는 친근한 말투가 ‘만기쌤’의 매력이었다. 지상파 채널의 장학퀴즈 프로그램에 논술 출제자로 먼저 명성을 떨쳤던 ‘석록쌤’은 당시 차분하고 따뜻한 말투와 핵심을 짚어내는 명강의로 유명세를 탔다.

2003년 대학에 진학하며 EBS 강의도 추억이 됐다. 그 이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언어영역을 공부하며 머리를 쥐어짜던 여고생은 서른을 바라보는 3년차 기자가 됐다. 공교육 스타교사였던 그들은 사교육 업체 대표강사, 사설학원 원장 등을 거쳐 현재 입시 평가기관 평가이사와 사립대 입학사정관실장이 됐다. 친근한 ‘쌤’에서 이제는 한국 교육의 대표적 전문가가 된 이들을 14일 서울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함께 만났다. 



▶‘따뜻하고 묵직한’ 이석록-‘유쾌하지만 날카로운’ 이만기=외모 만큼이나 스타일도 무척 다른 두 사람. 각자의 나이를 묻자 이 실장이 “저는 1958년생입니다”라고 평범하게 답했다. 그러자 이 이사가 냉큼 말을 이어갔다. “아, 형이 58년 개띠였지. 그 때 개들이 많이 죽은 거 알아?” 폭소가 터졌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 1961년생입니다. 아주 영(young)하죠.” 능청까지 더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묻는 질문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황금기를 “EBS 강의하던 때”라고 답했지만 표현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 실장은 “울산에 설명회 때문에 내려갔더니 공항에 팬클럽이 20명이나 나와있더라“며 “이름이 ‘석사랑’이었다. 팬클럽 수가 많지는 않고 음…한 수백명 정도?”라며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반면 이 이사는 “EBS 강의할 때 방송국이며 집이며 팬레터가 계속 왔다”며 “내가 당시 우리 나이로 36살이었는데 외모가 좀 먹어줬지. 애가 둘일 때였는데 남들이 총각인줄 알았다니까”라며 웃음 띈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이 실장은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한 사람이다. 차분하고 나즈막한 목소리, 그리고 천천히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그의 말은 듣는 이를 저절로 경청하게끔 한다. 배를 잡게하는 유머와는 그리 친하지 않다. 사실 재미는 좀 떨어진다.

이 이사는 정반대다. 한 마디로 괴짜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엔 늘 위트가 묻어난다. 허나 그를 ‘허허실실’이라 여긴다면 오산이다. 가볍게 던지는 듯 하지만 말 속 핵심은 명확하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이래저래 돌려 표현하는 일이 없다. 



▶“당시엔 조용필, 비 보다 우리가 나았다”…일반 교사 연봉 2배 이상 벌기도=스타일은 명확히 다르지만 이들이 걸어온 행보는 쌍둥이마냥 닮아있다. 어려서부터 교사에 대한 꿈과 열망을 키워온 것이 첫번째 닮은 꼴이다.

이 실장은 대학 졸업 후 국회 사무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본인은 답답했다. 톱니바퀴 굴러가듯 똑같은 삶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가르치는 일이 의미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상당히 보람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국회를 그만두게 된 가장 큰 이유였죠.”

이 이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이북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장래 희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새겨진 이후부터 교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그다. “교사를 해야겠다라기 보다는 교사 밖에 할 게 없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이 실장은 1985년에, 이 이사는 1986년에 교편을 잡았다. 서울 화곡고와 인천 문일여고가 그들의 둥지가 됐다. 교직생활 10년을 넘길 때쯤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다. EBS가 고교 교사를 대상으로 강사 오디션을 진행한 것. 학교의 추천을 받은 교사들이 카메라테스트와 면접을 거쳤다.

강의로 스타덤에 먼저 오른 건 이 이사였다. 당시 그는 이전 EBS 강의와는 전혀 다른 강의를 선보였다. 유머는 물론 최신 유행어도 사용하고, 강의 중간에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기도 했다.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EBS 강의의 틀을 바꿨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엔 조용필과 비가 부럽지 않았을 정도”라고 말하는 이 이사. “그 때가 내 인생 가장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모 기자가 ‘바람이 뭐냐’고 물었는데 당시 내 대답은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순간 순간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이 실장도 마찬가지다. 장학퀴즈 프로그램을 지방에서 진행할 때면 이 실장의 사인을 받기 위해 마을 어귀까지 줄이 길게 늘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제가 방송 강의를 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는 게 행복했어요. 전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내 지식을 그들에게 충분히 전달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게 보람이 되더군요. 또 그만큼 학생들의 반응이 느껴지니까 설렜어요. 조금 더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싶다는 의지가 강해지더라고요.

학교 수업과 방송일을 병행하던 탓에 이들의 당시 스케줄은 ‘0교시가 시작되는 아침 7시 출근→오후 6시 수업 종료→오후 8시 녹화 시작→자정께 귀가→새벽 2~3시까지 방송 원고 작성’ 등 살인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답답한 학교의 현실, 교실 현장의 안타까움…둥지를 떠나기로 하다=하지만 교육자로서 그들 인생의 1막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들의 교사로서의 삶은 행복했지만 현실은 마음같지 않았다. EBS 강의로 유명세를 타니 주변 교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사립 학교 교사로서 겪는 남모를 고충도 있었다.

이 실장은 특히 무너져가는 교실 현장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집중하지 않는 등 면학분위기가 점점 엉망이 됐다”며 “가끔은 너무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쉬움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2002년 이 이사는 메가스터디로, 20004년 이 실장은 강남 대성학원 대표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교직 생활을 시작한지 각각 17년, 20년째 되는 해였다.

세상은 그들을 고운 시선을 보지 않았다.학생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 이사는 ”욕 많이 먹었다. 싸가지 없다고(웃음)”며 “학생들이 ‘이젠 이만기 강의 들으려면 돈주고 봐야하는 거냐’며 항의하더라”라고 전했다. 일부 교사들은 ”현명한 선택“이었다며 격려를 해주기도 했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공교육 대표 스타교사였던 그들이 사교육의 첨병이 되는 모습에 일부 사람들은 큰 실망을 표했다. 사람들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선택의 배경을 ‘돈’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들은 ‘돈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고 늘 강조한다. “솔직히 말하면요. 당시 일반 교사 봉급보다 두배 이상의 돈을 벌었습니다. 학교 수업하고 EBS 강의하고 참고서 쓰고 외부 강연까지 하는 일이 워낙 많다보니 수입도 많았어요. 10년 전인 당시에 억대에 달하는 돈을 벌었어요. 돈에 아쉬울 건 없었죠. ”(이 실장)

그들을 이끌었던 건 공교육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을 함께 이뤄가자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같이 큰 그림을 만들어보자고 하더군요. 연구재단이나 대안학교 등을 세우자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했어요. 내가 당시 공립학교 교사였다면 학교에 머물렀을테죠. 공립고 특채를 치렀지만 낙방하기도 했고요.”(이 이사)

학교 현장에 대한 실망이 컸던 이 실장에게는 ‘양질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사교육 업체의 제안이 솔깃했다. ”당시 제 나이가 마흔일곱이었습니다. 학원으로 나오기엔 좀 늦은 시기였죠. 정말 돈을 벌고 싶었다면 적어도 30대 후반엔 나왔을 거에요. 수준이 높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가르칠 수 있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업체에서 말하더라고요. 실제로 아이들이 수업을 너무 잘들어주고 열정적으로 하더라고요.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공교육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이 있다”=사교육 업체 대표 강사로 그들의 인생도 2막이 올랐다. ‘스타 교사’에서 ‘스타 강사’로 자리매김했다. 사교육을 선택한 것에 대한 여론의 질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잦아들었다.

이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사실 그 어떤 질타보다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이 자신을 더 괴롭혔다. ‘공교육에 대한 원죄의식’, 두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엔 이 원죄의식이 늘 짙게 깔려 있었다.

“내 선택에 대한 착잡함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더라고요. 미안함과 죄의식이 항상 마음을 지배했습니다.”(이 실장)

“전 조금 달라요. 제 선택에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도전만 있었어요. 하지만 공교육에 죄를 졌다는 생각, 공교육을 떠난 사교육으로 온 것에 대한 미안함은 컸습니다. 일종의 ‘원죄의식’이죠.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이 이사)

이런 ‘원죄의식’은 사교육 업체 대표강사로, 현재는 민간 진학진로 상담기관의 평가이사로 일하는데 있어서도 때론 걸림돌이 된다.

“몸은 사교육에 있는데 머리는 공교육에 가있는 거죠. 학원강사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있어요. 거칠게 말하면 공교육을 까면서 사교육을 이야기해야하는데, 우리는 자꾸 ‘사교육은 보완재다. 공교육이 우선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사교육에 왔으면 이 조직의 논리에 충실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죠. 이것도 문제가 있어요.나 스스로 ‘공교육자인 척 하지말자’고 자기비판을 하기도 해요.” (이 이사)

이 실장은 결국 이 원죄의식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됐다. 그는 지난해 1월 모교인 한국외대 입학사정관실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다시 공교육의 일원이 됐다. 강의는 물론 운영하던 학원도 접었다. 소득은 반토막이 났다.

이 실장은 “외대에서 ‘공교육으로 다시 돌아와 의미있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의가 왔다”며 “고민 끝에 ‘내가 다시 돌아갈 곳은 공교육’이라고 결론 내렸다. 소득 문제 때문에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안 됐다”고 했다. “돌아와보니 너무 재밌어요. 사실 사교육에 있을 땐 신분상의 문제 때문에 사교육 입장을 대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내 스스로가 투명할 수 있죠. 학교를 위해 일을 하고 공교육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는…. 참 보람돼요.”



▶20여년간 같은 길, 하지만 앞으론 각자의 길 찾아 떠날 것=쌍둥이처럼 비슷한 길을 걸어온 이 이사와 이 실장. 단순히 고등학교 교사에서 사교육 업체 강사가 된 것만이 아니라 두 사람은 함께 참고서를 저술했고 학원을 운영하고 강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떼려야 뗄 수 없는 ‘협업’의 관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이 실장이 입학사정관이 돼 공교육으로 돌아갔고 이 이사는 사교육에 남았다. 이 이사는 “내가 학교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두 사람의 미래가 이젠 다른 형태로 그려지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 이사는 “오라는 곳이 없어서 못 가”라며 농담으로 운을 뗐다. “난 지금도 공교육을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유웨이중앙교육은 학원이 아니라 입시기관이고 순수한 평가기관이죠. 사교육의 범주에 있지만 국가 교육의 발전을 돕고 있죠. 난 유웨이를 ‘민간평가기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국어교사, 대입 강사의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진로진학적성전문가로 인생의 3막을 시작하고자 한다. 최근엔 EBS 라디오 강의 프로그램 출연을 제외하고는 모든 강의에서 은퇴했다. 공부도 시작했다.

“설명회를 다녀보면 부모가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아이를 교육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제 성적 만으로 결론짓던 단순한 입시 시대는 끝났어요. 아이의 적성, 진로를 고려한 육아가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한 진학 상담이 이뤄져야합니다.”(이 이사)

이 실장이 펼쳐갈 인생 3막은 일단 학교 현장에서 끝까지 봉사를 하는 것, 그리고 현장에서 은퇴를 한 이후에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가정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 3명에게 지정기부를 하고 있다.

“후학들이 커나가는데 도움을 주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특히 공부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하지 못하는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해서요. 나도 촌놈이었고, 당시 공부할 때 어려움이 많이 있었거든요.”(이 실장)


<박수진 기자>/sjp10@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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