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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위기’ 이겨내고 ‘세번의 유혹’ 떨쳐낸 정지완 솔브레인 회장 겸 코스닥협회장
뉴스종합| 2013-06-05 08:14
[헤럴드경제=박세환ㆍ김우영 기자] 누구에게나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정말 세 번의 기회가 오는 것인지, 혹시 왔는데 모르고 지나친 것은 아닌지, 또는 아직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은 아닌지 궁금할 때가 많다.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기회’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기회’보다는 ‘위기’와 더 많이 맞닥뜨린다. 결국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기회를 잡는 것이 아닐까. 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유혹’을 떨쳐내는 사람이야말로 당당히 ‘성공’의 축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벤처 1세대’로 창업 26년 만에 연매출 6000억원대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솔브레인의 정지완(57) 회장은 ‘기회’를 쫓기보다는 ‘위기’와 ‘유혹’ 속에서 성공 신화를 일궈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 차례 빗줄기에 황사 먼지가 씻겨 내려간 5월의 어느 날, 정 회장을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솔브레인 중앙연구소에서 만났다.

지난 2월 코스닥협회 제8대 회장에 추대된 그는 협회 운영과 기업 경영으로 하루 수면시간이 5시간이 채 안 된다는데도 지친 기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첫 모습에서 40대의 패기가 느껴질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유혹’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눈앞의 이익을 뿌리치기는 더욱 그렇다. 정지완 회장은 그가 옳다고 믿는 길만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다. 여러 번의 위기와 유혹은 이겨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 찍기가 무척 어색했다는 정 회장은 코스닥협회장에 추대된 뒤 각종 언론 인터뷰가 이어지면서 ‘사진 찍기의 달인’이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학교 다닐 땐 축구 야구 가릴 것 없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불릴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군대에서 허리를 다친 후로는 유연성이 떨어져 구기운동 대신 매일 아침 90분간 스트레칭과 웨이트트레이닝을 합니다.”

정 회장은 활기찬 모습의 원동력을 25년간 하루도 빠짐없는 새벽운동에서 찾았다. 그는 “원래 장사는 체력싸움”이라며 “스트레스가 많고 스케줄도 타이트해 체력이 안 받쳐주면 힘들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입에서 나온 거리낌 없는 ‘장사’라는 말에 고개가 갸우뚱했지만 그의 ‘오퍼상’ 이력을 들어보니 금방 납득할 수 있었다.



▶‘오퍼상’에서 6000억원대 중견기업 CEO로=정 회장은 1975년 성균관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82년 졸업 때까지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특히 군 복무시절 10ㆍ26과 12ㆍ12 사태를 겪으며 혼돈의 시대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정치ㆍ사회가 혼란스럽다 보니 모두가 침체를 면치 못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 취직자리도 없었어요. 특히 공대 출신은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죠.”

성원교역이라는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간 정 회장은 진로를 고민하다가 사업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1986년 무작정 사무실을 차렸다. 솔브레인의 전신인 ‘테크노무역’의 시작이다. 당시 나이 31세. 전화기와 타자기만 있으면 차릴 수 있다는 ‘오퍼상’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왕이면 고부가가치 사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에 눈여겨봤던 반도체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1980년대 초부터 삼성과 금성반도체, 현대전자 등 3개 업체가 경쟁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투자할 때라 오퍼상들의 일감이 많았다”며 “당시 오퍼상이 그랬듯,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돈 되는 품목이면 닥치는 대로 중개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일본 반도체 관련 소재기업과의 거래를 늘려 나갔다.

반도체 관련 사업이 망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선 정 회장은 “반도체용 에천트(Etchant·식각액)를 일본 등에서 수입해 국내 반도체업체에 공급했는데 수익성이 꽤 좋았다”며 “내가 직접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에 일본과 합작으로 제조 공장을 만들게 됐다”고 전했다. 당시는 국내에서 반도체용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전무해 일본 등 선진국에서 전량 수입하던 시절이었다.

무역업에서 반도체 소재 제조업으로 방향을 전환한 테크노무역은 사명을 ‘테크노세미컴’으로 바꾸고 삼성전자, 하이닉스와 LG반도체(이후 합병) 등 국내 반도체산업의 성장세와 맞물려 에천트 국산화에도 성공했다.

이후 사명을 지금의 ‘솔브레인’으로 바꾸며 25년 한길을 걸어온 지금, 삼성전자의 수많은 협력사 가운데 ‘글로벌 강소기업’ 14개사에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기술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발전했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다=솔브레인은 임직원 1250명에 연매출 6000억원, 시가총액 7000억원대 규모의 우량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정 회장이 늘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은 아니다.

많은 중소기업이 그랬듯, 창업초기에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고향인 대전 인근의 충남 공주 농공단지에 공장을 세우고 반도체를 씻어내는 고순도 인산과 증착재료인 절연막(국산화 최초)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품 출시 후 2년이 지나도 단 한 건의 판매실적을 올리지 못하며 깊은 좌절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포장에 있었다. 용기 틈새로 유독성 약품이 자꾸 흘러나오는 바람에 반도체 업체들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현대전자(지금의 하이닉스) 공장 문 앞에서 제품을 앞에 놓고 울고 있던 영업사원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바이어들을 찾아가 제품을 선보이고, 용기를 보완해 결국 반도체 기업들의 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 기쁨은 뭐라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오히려 성장가도의 밑거름이 됐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주변 사업체들이 차례로 경매로 넘어가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이들 공장을 사들였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투자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자신이 운영하던 공장부지(6600㎡)의 4배 규모를 매입해 액정표시장치(LCD) 디스플레이용 에천트 사업에 뛰어드는 강수를 두면서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정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IMF 위기를 상대적으로 덜 느낄 수 있었다”며 “불황일 때 투자가 답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결국 회사의 큰 성장 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도 신성장 분야에 승부수를 띄웠다. 스마트폰 화면의 딱딱한 유리를 얇게 가공하는 분야였다. 삼성코닝정밀소재와 아사히글라스 등 유리기판 업체들이 만든 0.5㎜ 두께의 유리를 0.2~0.3㎜ 수준으로 줄이는 화학 처리 소재를 개발했다. 정 회장은 “금융위기 당시 대기업도 신규 투자에 망설이고 있는데 중소기업이 수백억원의 투자를 결심하기는 힘든 일이었다”며 “만일 그때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기업이 독식했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정 회장은 ‘위기(危機)’라는 말에 ‘기회(機會)’의 ‘기(機)’자가 있는 것처럼 시련에 굴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버겁더라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선택이 지금의 솔브레인을 일궈냈다고 자부한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정지완’=위기만이 그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유혹’과의 싸움이야말로 지금의 정 회장을 만들었다.

창업 초기 첫 번째 위기를 넘긴 정 회장의 사업은 순탄했다. 반도체 제조업체로부터 신뢰를 얻은 그는 “한 달에 57만원 받던 월급쟁이가 한 달에 5000만원씩 벌게 됐다”며 “당시 5000만원이면 강남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고 설명했다.

현금이 넘쳐나면서 ‘유혹’의 손길이 뻗히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큰돈이 생기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주변 얘기에 솔깃해지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땅투기가 제법 짭짤하다는 주위 말을 듣고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며 “그러나 땅을 사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부동산 투자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빨리 정리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투자에 눈을 떴다면 아마 수천억원대 땅부자가 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건실한 기업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 ‘유혹’은 나이 40대에 다가왔다. 2000년에 솔브레인을 코스닥시장에 상장시킨 직후의 일이다.

“정말 정직해야만 할 자본시장이 일부 작전세력에 의해 악용되면서 시장이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는 과정을 보면서 자본시장에 대한 우려와 실망이 교차했습니다.”

외환위기 직후 벤처 창업 붐이 일어나면서 1999~2000년 벤처 주식을 샀다하면 2~3배 남는다는 말이 횡행할 정도로 벤처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작전세력의 장난도 적지 않았다.

“솔브레인을 상장하는데 벤처캐피털과 증권사 직원들이 찾아와 ‘작전’은 일생일대의 기회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당시 주변 벤처기업가들에 물어봐도 ‘해도 된다. 다 한다’는 답변이 돌아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실제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작전세력과 만나기도 했다.

“일명 ‘주가 띄우기’ 프레젠테이션을 받아보니 ‘딱’ 범죄모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전 개요를 설명하면서 저한테는 주식만 팔지 않고 있으면 몇백억원 챙겨주겠다고 하더군요.”

집에 와 곰곰이 생각했지만 ‘범죄’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이튿날 세력들이 회사로 찾아오기로 돼 있었는데 일부러 늦게 출근했다”며 “아무리 생각해도 ‘작전’은 범죄 같아 안 하겠다고 했더니 세력들은 얼마나 잘 되는지 두고 보자며 협박까지 하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정 회장은 착실히 키운 회사를 한순간의 유혹에 크게 망칠 뻔 했다며 아찔해했다.

그는 “벤처기업인 가운데 정말 몰라서 당한 사람이 많은데 (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제일 잘한 결정인 것 같다”며 “그때 작전을 했으면 회사도 망치고 나도 쫓기는 신세가 됐을 것”이라고 허탈한 웃음을 내비쳤다.

세 번째 유혹은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 성공한 벤처기업인이 잇따라 정치권에 발을 담그면서 정 회장을 향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요? 원래 자리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코스닥협회장도 여러 차례 고사하다가 선배 기업인들이 추천해 만장일치로 추대되면서 어렵게 수락한 것이지, 정말로 기업 경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정 회장은 다른 기업인들이 정치적 행보를 걷는 것은 그들의 신념과 선택이라며 자신은 기업가의 길을 걷는 것이 주어진 소임이라고 강조했다.



▶‘신뢰’와 ‘정직’ 경영철학…“코스닥, 첨단기술주 시장으로”=정 회장이 이처럼 ‘유혹’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창업 초기부터 지켜온 ‘신뢰’와 ‘정직’이라는 경영철학 때문이다.

정 회장은 업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 ‘정직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창업 초기부터 납기일을 정확히 지키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평소 경영철학에서 얻어진 평가다. 직원을 단 한 차례도 구조조정하지 않은 것도 ‘직원과의 신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투자자의 신뢰를 저버리면서까지 개인의 이익을 챙기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코스닥협회장을 맡은 지금, 정 회장은 코스닥 발전을 위해 다시 한 번 ‘정직’을 강조한다. 그는 “가장 정직해야 하는 게 자본시장”이라며 코스닥 기업들에 자본시장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과거 코스닥 붐이 일 때 많이 발생한 횡령이나 배임 등 불미스러운 일로 훼손된 신뢰가 회복돼야 재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뢰를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편으로 정 회장은 “끊임없이 트렌드를 읽으며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실천하는 것”을 꼽았다. 자신도 과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 잠시 자만하기도 했다면서 “변화무쌍한 시장 트렌드 속에서 CEO가 오판하면 기업이 부실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와 같은 맥락이라고 정 회장은 강조했다. “기업하는 사람에게 창조경제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해왔고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이지요.”

코스닥 기업의 투자나 연구개발에 대한 세제혜택 등 정부 지원도 역설했다. 정 회장은 “코스닥은 중소벤처기업 CEO에게 꿈이자 희망”이라며 “코스닥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 코스닥에서 성장한 기업이 유가증권시장으로 옮겨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구글이 성장한 후에도 나스닥에 남아 있듯 코스닥도 첨단 기술주 전문시장으로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의 일환으로 강조되는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해오지 못한 페어플레이, 공정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진정한 경제민주화”라고 설명했다.

격동의 현대사와 굴곡의 경제사를 건너온 그가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포부를 드러냈다. 매년 희망나눔 캠페인을 통해 각종 난치병 어린이를 돕고 있는 정 회장은 “기업의 궁극적인 활동인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안정적으로 펼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신뢰와 정직을 바탕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염원과 함께 인터뷰를 마쳤다.



/greg@heraldcorp.com



▶정지완 회장이 걸어온 길

▷1956년 대전 출생

▷충남고,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졸업

▷1986년 테크노무역 창립

▷1998년 K.Y HUTECH 대표이사

▷1999년 테크노세미켐 대표이사 사장

▷2003년 훽트 대표이사

▷2011년~ 솔브레인 대표이사 회장

▷2013년~ 제8대 코스닥협회 회장





<이홍희 전 서울대 명예교수…내가 본 정지완 회장은>

명쾌하고 든든한 정 회장의 모습이 짧은 머리와 어울려 산뜻하면서 진취적인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실상 알고 보면 그와 동시에 그 내면에 깊숙한 여러 맛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정 회장이 하는 말 중에 “나는 ‘오퍼상’이었는데요”라는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코스닥협회장 취임기념 간담회에서도 스스로를 ‘오퍼상’으로 소개한 걸로 알려졌는데 이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정 회장이 세운 솔브레인(구 테크노쎄미켐)은 지난 7년간 그 크기가 무려 다섯 배 넘게 급성장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원동력이었던 그 초심을 잃을 수 있다는 마음에 스스로를 채찍질했으리라. 내공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쉽게 나올 말들이 아니다.

자그마한 기업을 중견기업으로까지 키워 온 데는 자신만의 철학과 안목이 있었을 것이다. 솔브레인은 전통적으로 정보전자산업분야 회사들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해왔다. 이들 회사가 급성장하면서 같이 자라왔지만 고객사가 필요로 하는 재료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앞날에 무엇이 필요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안목이 없었더라면 이같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객사의 필요에 성심으로 임한다는 자세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만이 기업에 가장 중요한 믿음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을 늘 주지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키워지는 대목이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정도를 지킨다는 것이 힘들 수 있다. 옆에서 지켜볼 때 정 회장은 정도로 가도록 노력하는 사람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다. 장사를 하지만 이익만이 모든 게 아님을 주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상도’라는 TV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하고 되뇌어지는 것은 ‘나는 사람 장사를 하는 것이지 돈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정 회장도 이 책과 드라마를 봤다고 했다. 사실 역설적으로 사람 장사같이 큰돈 장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빼어난 안목을 갖고 필요하다면 일일이 찾아다니며 공동의견을 추출해 낼 수 있는 정 회장이 협회장으로서 코스닥 도약을 어떻게 이끌지 기다려진다. 또한 확고한 비전으로 열정적으로 헌신할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에 코스닥협회에 훈풍을 불러들이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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